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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네가 시작한 일이다."
아버지는 피 섞인 가래를 내뱉으며 도윤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쥐었다. 병실의 공기는 이미 죽음의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산소호흡기 너머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는 마치 거대한 산맥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같았다.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듯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서울이 얼어붙기 전에, 네가 만든 그 감옥을... 네가 직접 부숴야 해. 김도윤, 약속해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기계적인 비프음이 정적을 찢었고, 도윤은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유언의 무게에 짓눌린 채 홀로 남겨졌다. 아버지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가 무엇을 시작했다는 말인가.
***
새벽 4시의 서울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칼바람은 바늘처럼 날카롭게 피부를 찔러왔다. 낡은 자취방의 매트리스 위에서 도윤은 두 대의 단말기가 동시에 울부짖는 소리에 눈을 떴다. 진동은 마치 발밑에서 일어나는 지진처럼 불길하게 방 안을 흔들었다.
왼쪽 단말기에는 ‘서울 시청 재난안전본부’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오른쪽 단말기는 발신자 제한 번호였다. 하지만 그는 그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박시온. 도윤의 사수이자, 이제는 서울의 흐름을 되돌리겠다고 선언한 원류파의 전략가.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거울 속의 남자는 유령처럼 창백했다. 시청에서는 도윤을 ‘이상 기상 분석팀 계약직’이라 부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중재 단위-7’이라는 기계적인 명칭으로 통했다. 양 진영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균열을 메우는 임시 땜질용 자원. 그것이 도윤의 진짜 직함이었다.
책상 위에는 서로 다른 직함이 박힌 명함 뭉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분석가, 어떤 곳에서는 임시 조정자. 도윤은 그것들을 한꺼번에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집을 나섰다. 복도에 발을 내딛자마자 폐부 깊숙이 박히는 차가운 공기는 마치 얼음으로 만든 검이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시청 로비에 도착했을 때, 히터의 건조한 바람이 코 안쪽을 따갑게 긁어댔다. 그는 습관적으로 안내 데스크 옆의 단말기에 손을 올렸다. 도윤의 인사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서였다. 화면이 깜빡이더니 이내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용자: 김도윤(金度潤) / 직위: 중재 단위-7]
본문은 통째로 검은 블록에 가려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검은 잉크를 쏟아부은 것처럼, 도윤의 과거와 계약 조건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화면을 넘기려 하자 페이지가 1페이지에서 갑자기 5페이지로 점프했다.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차단이었다.
"또 그걸 보고 계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인사 담당자가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낀 채 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동정인지 멸시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빛이 서려 있었다.
"제 계약서 원본을 보고 싶습니다. 분명 처음 계약할 때는 정규직 전환 조건이..."
"김도윤 씨, 그러니까 제가 몇 번을 말합니까. 임시직의 숙명 같은 거예요. 처음 계약 때는 정규직... 아, 아닙니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라 저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담당자는 도윤의 말을 자르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가 흘린 짧은 실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 계약 때는 정규직이었다고? 그렇다면 지금의 이 ‘중재 단위’라는 신분은 대체 누가, 왜 만든 것인가. 의구심이 엔진처럼 으르렁거리며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
한강 지하 터널의 공기는 오존 향과 피 냄새가 섞인 금속성 악취로 가득했다. 벽면을 따라 흐르는 푸른 빛의 균열은 마치 거대한 포식자의 혈관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도시수호파의 현장 요원들이 거리를 두며 도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이서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중재 단위-7, 준비됐나?"
이서하의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 파편 같았다. 그녀는 도시수호파 내에서도 가장 위험한 현장만 골라 다니는 요원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마력을 억제하는 은색 체인이 감겨 있었다.
"준비랄 게 있겠습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죠."
도윤은 균열 앞으로 다가갔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감각이 뇌를 자극했다.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워 연료로 쓰는 행위와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내면의 흐름을 끌어올렸다.
순간, 척추를 대형 트럭이 들이받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었고,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코끝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피였다. 마법의 물리적 코스트는 언제나 정직하고 잔혹했다.
"압력이 예상치를 상회합니다! 중재 단위의 바이탈이 위험 수위예요!"
멀리서 의료 단말기를 든 요원의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누구도 의식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는 고장 나면 교체하면 그만인 부품에 불과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균열의 틈새로 자신의 의지를 밀어 넣었다.
[사용자 정의 기준치 동기화 중...]
시야 한구석에 떠오른 푸른색 UI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이미 심장이 터져 나갔을 압력이었지만, 시스템은 도윤의 한계치를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정교하게 조정하고 있었다. 고통은 불길처럼 온몸을 태웠지만, 도윤은 죽지 않았다. 아니,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마침내 균열이 닫히고 터널 안에 정적이 찾아왔을 때, 도윤은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서 빠르게 식어갔다. 이서하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죽지는 않았네. 운이 좋은 줄 알아."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공격적이었지만, 도윤을 지탱하는 손길에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그녀 역시 이 시스템의 잔인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었지만, 결국 이 거대한 도시라는 전장에서 소모되는 병사들에 불과했다.
***
두 시간 후, 도윤은 성수동의 낡은 폐공장 지하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원류파의 은닉 거점이었다. 방 안에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싸구려 담배 연기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천장에 매달린 주황색 전구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벽면에 길고 불안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도윤의 앞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시청의 최가을, 그리고 원류파의 박시온. 한 명은 도시를 수호하는 조직의 리더였고, 다른 한 명은 그 도시를 재구성하려는 반역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마치 비즈니스 파트너처럼 도윤의 운용권을 두고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중재 단위-7의 다음 스케줄은 우리 쪽이 우선입니다. 종로 쪽 결계가 심상치 않아요."
최가을이 서류를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고, 도윤을 사람으로 대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글쎄요, 최 팀장님. 우리 쪽 데이터에 따르면 강남 지하의 한기가 폭주하기 직전입니다. 공동 사용 자원으로서의 효율을 생각한다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텐데요."
박시온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는 도윤을 ‘강이한 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역시 그를 ‘자원’이라 칭했다. 그는 그들 사이에 앉아 마치 경매장에 나온 물건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깊은 허무함이 가슴 속에서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처음 설계 당시 합의했던 내용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박시온이 슬쩍 도윤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설계 당시의 합의. 그 말에 최가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들은 그가 모르는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도시의 밑바닥에 흐르는 차가운 에너지와,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재 단위’라는 시스템의 기원을.
"그러니까, 저는 그냥 결정되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건가요?"
도윤이 건조하게 묻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도윤에게 꽂혔다. 박시온이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선택해야죠. 하지만 김도윤 씨, 당신의 선택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은 수수께끼 같았고, 도윤은 더 이상 질문할 기운조차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아까의 마법 반동으로 인한 이명이 여전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
일과가 끝난 후, 일행은 근처의 작은 포장마차로 향했다. 빨간 비닐 천 너머로 비치는 주황색 조명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따스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둔근한 열기가 얼어붙은 뺨을 어루만졌다.
석유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어묵 솥에서는 구수한 증기가 쉴 새 없이 피어올랐다. 멸치와 다시마 향이 진하게 배어 나온 국물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도윤은 자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종이컵을 쥐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가슴 중앙의 딱딱하게 굳은 긴장을 천천히 녹여주었다.
"자, 이거라도 좀 먹어둬요."
최가을이 말없이 김치전 한 조각을 도윤의 앞접시에 밀어주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도 마력 반동으로 인한 작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옆자리에 앉은 박시온은 젓가락을 새로 뜯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돈만 제때 들어오면 상관없습니다. 정규직이든 뭐든."
도윤이 자조적으로 내뱉자, 박시온이 술잔을 비우며 낮게 웃었다.
"거짓말이 서투르군요. 당신은 이 도시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그 누구보다 궁금해하고 있으면서."
도윤은 대답 대신 뜨거운 어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짭짤하고 쫄깃한 식감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시스템의 부품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감각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위안은 찰나에 불과했다. 포장마차 밖을 지나는 찬바람이 비닐 천을 때릴 때마다, 도윤은 다시금 그가 처한 현실로 끌려 돌아왔다.
***
자취방으로 돌아온 도윤은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단말기를 켰다. 샤워 후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려 소름이 돋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청의 보안 서버에 접속을 시도했다.
[경고: 비정상적인 접근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상급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화면 가득 붉은 경고창이 떴다. 도윤은 한숨을 내쉬며 포기하려 했다. 그런데 단말기 화면이 암전되기 직전, 1초도 안 되는 짧은 찰나에 회색 글씨 한 줄이 그의 시야를 할퀴고 지나갔다.
[보안 로그 확인...]
[중재 구조 설계: 승인자 – 중재 단위-7(본인 인증 완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윤은 눈을 비비고 다시 화면을 보았지만, 이미 단말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환각이었을까. 피로로 인해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까 로그를 확인하는 순간, 시스템이 그의 지문을 인식하며 보냈던 그 미세한 진동을. 본인 인증 완료. 그가 도윤을 승인했다는 말인가.
어두운 방 안을 채우는 단말기의 푸른 잔상이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도윤을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네가 만든 그 감옥을 직접 부숴야 한다.
도윤은 침대에 몸을 눕히며 창밖의 서울을 바라보았다. 빌딩 숲 사이로 몰아치는 눈보라는 마치 거대한 군대가 진격하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지옥 같은 시스템을 설계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만든 감옥의 문이 도윤을 향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밤은 깊어갔고, 서울의 마지막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도윤은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비치는 푸른 로그의 잔상을 쫓으며, 도윤이 잊어버린 진실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추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또다시 중재 단위-7로 불리며 전장으로 끌려가겠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누가 이 전쟁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도윤은 왜 스스로를 소모품으로 강등시켜 이 연극의 무대 위에 세웠는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도윤은 차가운 어둠 속에서 대답 없는 메아리만을 들을 뿐이었다.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다가왔다. 폭풍 전야의 정적 속에서, 도윤은 그가 부숴야 할 감옥의 벽을 더듬으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서울은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중심에 서 있는 그의 손에는 피 묻은 설계도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