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디딜 때마다 삭은 금속이 비틀리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폐공장의 눅눅한 정적 속으로 그 소리가 톱날처럼 파고들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섀도우의 잔해에서는 창백한 김이 스멀스멀 솟구쳤다. 썩어가는 심해어의 사체에서나 날 법한 비릿하고 차가운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도윤은 해진 코트 깃을 세워 목을 감싸고, 입구 쪽으로 뒷걸음질 치는 이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공장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미 살갗을 베어낼 듯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갈라설 시간입니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분석팀의 모니터를 응시하며 수치를 읊조리던 무미건조한 어조와는 달랐다. 시야에 들어온 이들의 얼굴은 제각각의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누군가는 눈동자를 잘게 떨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도윤의 손에 들린 것을 의심하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한때 서울의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분에 취해 있던 이들이었지만, 지금 그들 앞에 남은 것은 붕괴하는 콘크리트 더미와 목을 조여오는 어둠뿐이었다.
"김도윤 씨, 정말 이 길뿐인가요?"
박예슬이 떨리는 손으로 소매 끝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가 깨운 고대의 힘에 대한 경외와 근원적인 두려움이 뒤섞여 일렁였다. 도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녀의 떨림을 눈에 담았다. 데이터는 거짓을 말하지 않지만, 그 너머에 숨겨진 진실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시스템의 정교함만으로는 이 무너져가는 도시와 사람들을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도윤은 뼈저린 냉기 속에서 깨달았다.
"저는 더 이상 누군가가 짜놓은 설계도를 따라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박시온의 계획도, 도시수호파의 매뉴얼도 여기선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사람들이 동요하며 술렁였다. 그들에게 도윤은 이제 믿음직한 동료가 아니었다. 통제 불능의 변수, 혹은 재앙을 불러온 위험한 촉매일 뿐이었다. 겁에 질린 이들은 섀도우의 기운이 스며든 폐공장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도망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장송곡처럼 고막을 때렸다. 남은 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서하와 최가을, 김태균 선배, 그리고 이하린과 정유진만이 자리를 지켰다.
"남겠다면 내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그게 싫다면 지금 저들을 따라가세요."
도윤의 선언은 단호했다.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던 계약직 분석가의 허물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서하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두꺼운 외투 너머로 미세한 온기가 전해졌다.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구명줄 같은 감각이었다.
"말 좀 예쁘게 해요. 애들 다 겁먹었잖아."
이서하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눈빛만큼은 얼음송곳처럼 예리했다.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우리가 내딛는 이 발걸음이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도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삐걱거리는 계단을 내려와 서울의 어두운 혈관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상은 이미 섀도우의 포위망이 옥죄어 오고 있었다. 하늘은 불길한 초록빛으로 멍들어갔고, 나뭇잎 하나조차 숨을 죽인 채 굳어 있었다.
지하 상가의 공기는 눅눅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지상을 휩쓰는 칼바람보다는 훨씬 견딜 만했다. 도윤은 팀원들을 이끌고 오래된 칼국수 집 앞에 멈춰 섰다. '낙원 식당'이라는 빛바랜 간판이 지직거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섀도우의 감지망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차폐 구역이었다. 문을 열자 사골 국물의 진한 육향이 훅 끼쳐왔다.
"어서 오세요. 이 난리에 손님이 다 오네."
주인 할머니가 무심하게 인사를 건네며 행주질을 했다. 도윤은 주방 근처의 가장 따뜻한 자리를 가리켰다. 이서하와 최가을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김태균 선배는 낡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젖은 신발에서 올라오는 눅눅한 냄새가 식당의 훈기에 섞여 들었다. 도윤은 메뉴판도 보지 않고 칼국수 여섯 그릇을 주문했다.
"일단 먹고 생각하죠. 제 이름으로 달아둘 테니까 걱정 마시고."
식탁 위에 놓인 보리차 병에는 뽀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그릇의 미지근한 온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밖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이곳은 시간이 멈춘 섬 같았다. 이서하가 젓가락을 나누어주며 도윤의 손등을 살짝 스쳤다. 그녀의 손가락은 차가웠지만, 그 짧은 접촉은 요동치던 도윤의 심장 박동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네."
최가을이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식당 유리창 너머, 어두운 복도의 끝을 향해 있었다. 도시수호파의 리더였던 그녀에게 이런 무질서한 도피는 생경한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이중 스파이라는 위험한 줄타기를 멈추고 우리 곁에 남는 쪽을 택했다.
"배가 고파야 싸우는 법입니다. 최가을 씨도 그만 노려보고 한 입 들어요."
김태균 선배가 깍두기를 씹으며 껄껄 웃었다. 투박한 웃음소리가 식당의 적막을 깨뜨렸다.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칼국수가 나왔다. 뽀얀 국물 위로 송송 썰린 파와 볶은 고기 고명이 넉넉히 얹어져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국수를 들이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 위장을 데우자,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근육들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맛있네요. 정말로요."
정유진이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 뜨거운 김 때문에 안경이 뿌옇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기록자로서 이 순간을 어떻게 남길지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지금 그녀의 손은 펜 대신 숟가락을 꽉 쥐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본능, 그리고 함께 있다는 안도감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도윤은 국수를 반쯤 비웠을 때, 테이블 밑에서 낡은 석패를 꺼내 식탁 중앙에 내려놓았다. 첫 수호자들의 기록이 담겼다는 유물이었다. 표면에는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고,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식탁 위의 온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도윤의 손바닥 위의 돌덩어리에 집중되었다.
"이게 뭡니까?"
김태균 선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도윤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손가락 끝을 살짝 그었다. 붉은 피가 맺혔다. 묵직한 '툭' 소리와 함께 핏방울이 석패 중앙의 홈으로 떨어졌다.
순간, 석패에서 새파란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태양의 핵처럼 강렬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었다. 빛의 줄기가 그의 손목을 타고 팔을 향해 기어올랐다. 혈관이 파랗게 도드라지며 얼음 가시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치솟았다.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입천장까지 얼어붙는 한기에 숨이 턱 막혔다.
"김도윤 씨! 멈춰요!"
이서하가 도윤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거칠게 요동치던 한기가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석패는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식당 한가운데에 서울의 입체 지도가 푸른 환영으로 떠올랐다. 지도 위에는 검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서서히 옥죄어 들어오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섀도우의 포위망입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어요."
도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눈앞에 펼쳐진 절망적인 수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지도 위에는 붉은 점들이 불길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새벽 두 시. 해가 뜨기 직전이 정점입니다. 그때가 되면 서울의 모든 결계가 무너지고, 고대의 한기가 지상으로 완전히 분출될 겁니다."
"두 시라고요? 지금 열 시가 넘었는데, 네 시간밖에 안 남았다는 소리예요?"
최가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식당의 형광등이 가끔씩 깜박이며 싸늘한 백색광을 뿌렸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의 초침 소리가 마치 시한폭탄의 소리처럼 고막을 때렸다.
"첫 수호자들도 이랬을까요? 그들도 이렇게 시간이 부족했을까요?"
이하린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석패에서 뿜어져 나오는 북풍의 울음소리가 식당 안을 휘감았다. 그것은 오래전 사라진 자들의 경고이자,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유언 같았다.
도윤은 떨리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파랗게 질린 손등이 마법의 대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팀원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실무적인 합의가 필요했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우리에겐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섀도우의 눈을 피할 정보, 봉인 지점까지의 최단 경로, 그리고 봉인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도윤은 메모지에 볼펜으로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최가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보는 내가 맡죠. 도시수호파의 비밀 채널 중 아직 살아있는 게 몇 개 있어요. 상부에는 보고하지 않고 데이터만 빼오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배신자로 찍히는 길이에요."
"이미 우린 다 배신자예요, 최가을 씨. 새삼스럽게 뭘."
이서하가 픽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녀는 도윤을 보며 윙크를 해 보였다.
"이동 경로는 내가 책임질게요. 지상 도로는 이미 마비됐을 테니까, 지하 공동구랑 폐쇄된 지하철 노선을 이용해야 해요. 이진호 아저씨한테 들은 루트가 몇 개 있어요."
"김태균 선배님은 봉인 조작의 이론적 근거를 찾아주세요. 기상청 데이터와 고대 에너지를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니까요."
김태균 선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다시금 현장의 날카로움이 돌아와 있었다. 실패의 기억을 딛고 일어서려는 격투가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갈등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잠깐만요. 김도윤 씨의 그 고대 힘을 전면적으로 쓰면 안 됩니까? 석패를 이용하면 섀도우를 한 번에 밀어낼 수도 있잖아요."
정유진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도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대가는 내 생명입니다. 혹은 여기 있는 누군가의 희생이죠. 고대의 힘은 공짜가 아니에요. 우리는 최소한의 힘으로 정밀하게 타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다 실패하면요? 도시 전체가 얼어붙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실패의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누군가를 제물로 삼는 방식은 박시온과 다를 게 없어요. 저는 그런 길은 가지 않습니다."
식당 안의 공기가 다시금 팽팽해졌다. 국수는 이미 다 불어 터져 지저분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와 욕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며 부딪쳤다. 하지만 그 충돌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틈을 메워줄 수 있는 부분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도윤은 주머니에서 암호화 통신 장치를 꺼냈다. 박시온과 연결될 수 있는 마지막 채널이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그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김도윤 씨, 선택해야죠. 둘 다 가져갈 순 없습니다.'
도윤은 팀원들이 보는 앞에서 통신 장치를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구두 굽으로 그것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튀었고 타는 플라스틱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박시온이 공들여 쓴 각본은 이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제 그들의 플랜 B는 없습니다. 우리가 유일한 계획입니다."
도윤의 선언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것은 단순한 결별 선언이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가 이 도시의 운명을 짊어지겠다는 서약이었다. 이서하가 조용히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그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잘했어요. 속이 다 시원하네."
그녀의 온기가 얼어붙은 그의 혈관을 조금씩 녹였다.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 모든 일이 끝난다면, 섀도우가 사라진 맑은 서울의 아침을 그녀와 함께 걸을 수 있을까.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일행은 식당을 나섰다. 주인 할머니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도윤은 계산을 마치고 지하 상가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이미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 위로 검푸른 섀도우 기운이 안개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칼날 같은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등 뒤에서 잠시 새어 나오던 칼국수 집의 따뜻한 육수 냄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가 입구의 CCTV가 하얗게 번쩍이며 기괴한 소음을 냈다. 섀도우의 간섭이었다. 놈들이 그들을 찾았다. 팀원들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도윤은 계단 위를 응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돌아갈 곳은 없습니다. 앞으로 가는 수밖에요."
도윤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이서하가 그의 옆에 섰고, 다른 이들도 하나둘 도윤의 뒤를 따랐다. 일행은 섀도우가 지배하는 눈보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때였다. 상가 천장에 달린 낡은 확성기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흘러나왔다. 끊어진 라디오 전파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마지막 겨울이 온다. 선택해라. 첫 번째 수호자의 이름으로."
그것은 오래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혹은 죽었다고 알려진 이의 목소리였다. 일행은 얼어붙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울의 심장부에서, 멈췄던 시계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