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거대한 얼음 수의를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었다. 빌딩 숲 사이로 칼날 같은 회색 눈발이 몰아쳤다. 살결에 닿는 감촉은 눈이라기보다 잘게 부서진 유리 파편에 가까웠다. 시청 지하, 임시 상황실의 공기는 기계가 내뿜는 열기와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로 눅눅했다. 김도윤은 모니터 화면 속, 노란빛이 명멸하는 지도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섀도우가 뿜어내는 검은 냉기와 두 세력의 마법 충돌이 빚어낸 소용돌이는 마치 난도질당한 시체처럼 흉측했다. 도시수호파와 원류파. 두 집단의 공방은 이미 합리적인 선을 넘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도시 전체를 전장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정치적 요충지가 아닙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메마른 낙엽처럼 바스라졌다. 모니터 너머에서 최가을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음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시수호파의 현장 리더인 그녀는 도윤의 결정이 조직의 이익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검지 손가락이 탁자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탁, 탁, 탁. 그 소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시한폭탄의 초침처럼 도윤의 신경을 긁어댔다.
"김도윤 씨, 지금 그쪽으로 인력을 빼면 우리 방어선이 무너져요. 원류파 놈들이 그 틈을 타서 종로를 점령할 겁니다."
최가을이 입술을 깨물며 단호하게 뱉었다. 도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화면 속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민간인 거주 구역의 봉인이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보다 사람이 죽는 게 더 큰 손실입니다."
도윤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리라면, 최소한 물 건너는 사람부터 살려야죠. 누가 그 다리를 세워줬든 말입니다."
곁에 서 있던 이서하가 피식 웃으며 어깨에 멘 총을 고쳐 잡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서하가 최가을의 옆으로 다가서며 툭 던졌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그냥 가면 되지. 가을 언니, 도윤 씨 말이 맞아요. 우리 요원들이 정치 싸움이나 하려고 이 추위에 떨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최가을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까닥였다. 그것은 동의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포기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일행은 즉시 지하 상황실을 빠져나왔다. 첫 번째 목표는 외곽 거주 구역의 방어 부적 회로를 재가동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섀도우의 냉기가 가장 포악하게 날뛰는 지점이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습하고 비릿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전신주마다 피어오른 얼음 결정들이 희미한 비상등 불빛을 반사하며 기괴한 혈관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김도윤 씨, 괜찮겠어요? 저 회로,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닐 텐데."
서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도윤은 대답 대신 부적 회로가 새겨진 콘크리트 벽으로 다가갔다. 벽면은 이미 검은 서리로 뒤덮여 있었다. 섀도우의 잔류 마력이 회로에 기생하며 에너지를 빨아먹고 있었다. 이 잠든 회로를 깨우려면 외부의 순수한 마력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도윤의 육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 손등을 깊게 그었다. 붉은 선혈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얀 김을 내뿜으며 흘러나왔다. 피가 부적 문양에 닿는 순간, 얼어붙었던 회로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초기 상태로… 여기서 리턴. 제이슨… 아니, 제이슨이 아니라… 위에서 JSON. 원래 값으로 돌아가."
도윤은 통증을 잊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서하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농담이에요?"
"안 까먹으려면… 이상한 암기법이 최고라서요."
도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하지만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회로가 그의 피를 빨아들이며 마력을 역류시키기 시작했다. 팔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은 수천 개의 얼음 가시가 혈관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위장이 바닥을 뚫고 떨어지는 듯한 추락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김도윤 씨!"
서하가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지만, 몸 안의 냉기는 그 온기마저 얼려버릴 기세였다. 도윤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마력을 쏟아부었다. 부적이 박힌 벽면이 푸른 빛을 내뿜으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피와 금속성 마력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지하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 마침내 푸른 문양들이 하나씩 '틱' 소리를 내며 점등되었다. 지하 전체의 공기가 미세하게 데워졌다.
도윤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가락 끝은 감각이 사라져 남의 살처럼 느껴졌다. 손등의 상처는 이미 얼어붙어 피조차 나오지 않았다. 군대가 대열을 갖추듯 그의 몸 안 마력이 겨우 진정되었지만,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피를 그렇게 많이 쓰면, 다음에 쓸 게 남겠어요? 나눠서 해도 되는데."
서하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등을 감싸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손길은 의외로 섬세하고 따뜻했다.
"이 회로는 내 계보에 반응해요. 남이 대신하면 더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아직 버틸 수 있어요."
도윤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무릎이 꺾이며 다시 비틀거렸다. 서하가 재빨리 그의 허리를 부축했다. 그녀의 몸에서 도윤은 은은한 비누 향이 차가운 마력 냄새를 잠시나마 지워주었다.
일행은 인근의 폐쇄된 상가 지하 창고로 몸을 숨겼다. 1차 미션은 성공했지만, 팀원 모두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폭격음과 함성이 들려왔다. 서울은 불타는 동시에 얼어가고 있었다.
"앉아요. 국물이라도 좀 마셔요. 이 상태로 또 싸우러 가겠다고요?"
팀의 막내 격인 정유진이 휴대용 버너를 꺼내며 말했다. 그녀의 손엔 인스턴트 라면 봉지가 들려 있었다. 도윤은 시간을 아껴야 한다며 거부하려 했지만, 서하가 그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지금 안 먹으면, 다음 미션에서 누가 널 업고 뛰어야 하는데요? 내 허리는 소중하거든요."
서하의 농담 섞인 으름장에 도윤은 결국 젓가락을 들었다. 좁은 창고 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라면 냄새가 서늘한 공기를 밀어냈다. 스티로폼 용기 겉면의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 지옥 같은 도시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작은 안식처였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시자 얼어붙었던 내장이 서서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김이 안경알을 뿌옇게 만들었다. 도윤은 안경을 벗어 닦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수호자들 이야기… 그 사이에 들은 적 있습니까? 일부는 시스템 명령을 거부하고, 그냥 사라졌대요. 영웅이 아니라… 탈영병처럼요."
라면을 먹던 팀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유진이 젓가락을 멈추고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선배는 그들처럼 도망가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그들보다 나은 영웅이 되고 싶은 거예요?"
"영웅 같은 건… 관심 없습니다. 그냥… 누군가를 시스템의 제물로 올리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창고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그 빈틈을 메웠다. 서하가 도윤의 용기에 담긴 라면 면발을 한 젓가락 집어 가며 툭 던졌다.
"그럼 잘 먹고, 잘 버텨요. 살아 있어야 그런 거라도 지킬 테니까."
그녀의 짧은 위로에 도윤의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그들은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짧은 휴식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영양 섭취가 아니라,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 서로를 붙잡아주는 닻과 같았다.
휴식을 마친 일행은 2차 미션을 위해 다시 어둠 속으로 나섰다. 목표는 섀도우의 진원지로 향하는 지하 환기 터널이었다. 그곳은 양 진영이 설치한 마법 봉쇄장과 물리적 장벽으로 겹겹이 막혀 있었다. 도윤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두 진영의 연락책으로부터 온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깜박였다.
[박시온: 김도윤 씨, 그쪽 경로는 위험합니다. 우회해서 우리 쪽 보급로를 확보해 주세요. 대가는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정민석: 김도윤 씨, 지금 즉시 복귀하세요. 이건 행정 명령 위반입니다. 시민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우리 지령을 따라야 합니다.]
도윤은 스마트폰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들의 지령은 오직 자신들의 전력을 보존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시민'의 범주에, 지금 터널 밖에서 얼어 죽어가는 사람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저쪽 지령대로 우회하면, 적어도 한 진영한테는 빚을 지는 셈이에요. 나중에 써먹을 수도 있고요."
팀원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문제는, 그 빚을 갚으라고 할 때 내 손으로 누구를 버리라고 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다리는 결국 어딘가에 닿아 있어야 서 있는 거라지만, 그래도… 저 구역에 남겨진 사람들을 놔두고 돌아서긴 싫습니다."
도윤의 단호한 태도에 팀원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터널 입구에 도달하자 붉고 푸른 마력 장벽이 겹겹이 쌓여 기괴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장벽에 반사된 얼음 결정들이 눈을 찌를 듯 번쩍였다. 침입을 감지하는 경보 마법이 낮게 진동하며 공기를 울렸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내가 양쪽의 인증 패턴을 동시에 흉내 내서 통로를 만들 테니, 신호가 오면 즉시 통과하세요."
도윤은 장벽 앞에 서서 양손을 뻗었다. 왼손에는 도시수호파의 마력을, 오른손에는 원류파의 마력 파동을 실었다. 서로 다른 성질의 힘이 그의 몸을 통로 삼아 충돌하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꽃과 차가운 얼음 폭풍이 동시에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매캐한 오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윽…!"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두 계열의 마력이 그의 신경계를 난도질하며 지나갔다. 귀에서는 웅 하는 이명이 울렸고, 한쪽 눈이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번쩍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멈추면 이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고, 서울의 겨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장벽이 일렁이며 틈이 생겼다. 도윤은 비틀거리며 팀원들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터널 안으로 발을 들이자, 장벽은 다시 굳건하게 닫혔다. 뒤편에서는 추격해오던 무장대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터널 안쪽은 섀도우가 만들어낸 냉기 환영들로 가득했다. 하얀 입김 사이로 흐릿한 사람 형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일행을 향해 손을 뻗기도 했다. 환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조여드는 공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림자가 등을 기어오르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동요하지 마세요! 앞만 보고 갑니다!"
서하의 외침이 터널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환영들을 향해 거침없이 탄환을 퍼부었다. 마력이 실린 탄환이 환영을 꿰뚫을 때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윤은 마비가 오기 시작한 왼쪽 다리를 끌며 필사적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늪을 걷는 것처럼 무거웠다.
마침내 통로 끝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고대 봉인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석문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문 너머에서 낮고 깊은 울림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괴물의 심장 박동 소리 같았다. 터널 전체가 그 진동에 맞춰 미세하게 흔들렸다.
"여기서 물러나도,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어요. 굳이 이 문까지 열 필요는… "
유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여기서 돌아간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안의 데이터가, 그리고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문을 열지 않으면 서울에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른 길이 있다면… 거기서 벌써 누가 찾았겠죠.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입니다."
도윤은 숨을 고르며 석문으로 다가갔다. 몸에 남아 있던 마력이 문 너머의 울림에 공명하듯 불규칙하게 뒤틀렸다. 고통은 이미 감각을 넘어선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이 일만 끝나면… 서울에도 다시 봄이 올까요? 눈 말고, 벚꽃 같은 거요."
서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석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당당함 대신 희미한 갈망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그녀를 흘낏 바라보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마침내 어디 좋은 데 있으면 좀 안내해 주십시오. 나는 데이터랑 맛집밖에 몰라서요."
"약속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죽지 마요."
서하가 도윤의 손을 짧게 쥐었다 놓았다. 그녀의 온기가 마지막 마력을 쥐어짜는 원동력이 되었다. 도윤은 석문의 중앙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돌아가고 싶어도… 이제는 문이 어디 있었는지도 잊었습니다."
그가 마력을 주입하자, 석문 표면의 얼음 문양들이 순식간에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이 초기화되는 과정과 흡사했다. 그리고 문양들이 멈춘 순간, 도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석문 위에 형상화된 패턴은 그가 의식 중에 사용했던 암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Return JSON."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암호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문은 거대한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눈부신 빛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심연의 냉기였다.
그들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 이 문을 연 진짜 수혜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일행은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발밑의 얼음이 '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것은 마치 운명의 실타래가 끊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