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말기가 차가운 금속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김도윤은 멋대로 경련하는 손가락을 펴서 화면 위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깨진 유리창 틈새로 스며든 겨울 저녁의 푸른 빛이 폐허가 된 회의실 안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반쯤 파괴된 천장 조명은 신경질적으로 깜빡거리며 벽면 위로 기괴하게 늘어진 그림자들을 흔들어댔다. 도윤은 까끌거리는 목구멍 너머로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에서는 전투 내내 씹혔던 콘크리트 먼지와 말라붙은 피의 비릿한 금속 맛이 맴돌았다.
"이게 제가 제안하는 최종 합의안의 뼈대입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젖은 모래를 긁는 듯 거칠었다. 그는 단말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린 백색광을 허공으로 투사했다. 공중에 떠오른 홀로그램은 유려한 문장 대신 간결한 키와 값으로 이루어진 코드 덩어리였다. 정갈하게 정렬된 JSON 구조가 허공에서 명멸했다. 박시온은 눈을 가늘게 뜨며 쏟아지는 텍스트의 파편들을 훑었다. 늘 가면처럼 쓰고 있던 온화한 미소는 이미 조각난 지 오래였다. 대신 그 자리에는 정밀한 계산기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전략가의 눈빛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규칙을 데이터화하겠다니, 발상이 발칙하군요. 김도윤 씨?"
박시온이 물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미지근한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식어버린 커피의 쓴 향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힘없이 흩어졌다. 도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제멋대로 해석할 수 없는 절댓값이 필요합니다. 여기 'magic.cost.vitality' 항목을 봐주십시오. 마법을 끌어 쓸 때마다 사용자의 생명 수치가 실시간으로 기록됩니다. 만약 설정된 한계치에 도달하면, 시스템은 즉각적으로 접근 권한을 차단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최가을이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그녀의 단정한 제복 소매에는 털어내지 못한 검은 그을음이 훈장처럼 묻어 있었다. 그녀는 의자를 뒤로 길게 빼며 도윤을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우리 애들 목줄을 시청 데이터 센터에 통째로 넘기라는 거잖아. 우리가 왜 그런 감시 체계에 목을 매야 하지? 이건 도시수호파의 무장을 해제시키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어. 안 그래?"
"감시가 아니라 보호 장치입니다, 최가을 씨."
도윤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받았다. 그는 셔츠 소매를 거칠게 걷어붙였다. 창백한 팔뚝 위로 흉측하게 번진 푸른색 마력 화상 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잔류 마나가 신경을 긁어대는 통증이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올라왔다. 도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숨을 멈추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동료를 잃었습니다. 이 숫자들이 기록되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누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조차 통계조차 남지 않을 겁니다. 마법의 대가는 물리적이고 실재합니다. 그리고 그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죠."
박시온은 'magic.cost.memory'라는 항목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기억 중 일부가 이미 원류파의 대의라는 명분 아래 소모되어 사라졌음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입술을 뗐다.
"선택의 시간이군요. 이대로 서로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공멸할 것인지, 아니면 이 불편한 거울 앞에 나란히 설 것인지. 그런데 김도윤 씨, 이 'audit.trails'라는 항목은 대체 뭡니까? 거래 기록 추적이라니, 이건 명백히 선을 넘은 것 같군요."
회의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 듯 얼어붙었다. 누군가 의자를 뒤로 밀치며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날카롭게 찢었다. 도윤은 이 조항이 가장 거센 반발을 불러올 것임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아래로 떨리는 손을 숨기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특정 세력이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beneficiary.trace' 기능을 통해 마법 물자의 이동 경로를 투명하게 공개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 지옥 같은 전쟁을 설계한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습니다."
"그 배후가 우리 중 한 명이라면 어쩔 셈이지?"
최가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오른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찬 권총집 근처를 위태롭게 맴돌고 있었다. 도윤은 그녀의 살기 어린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렇다면 그 대가 역시 이 시스템에 영구히 기록될 겁니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박시온은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도윤의 무모한 고집이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분석하려는 듯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회의실 밖 복도에서는 멀어져 가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비명처럼 들려왔다. 서울은 거대한 얼음 바다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난파선과 다를 바 없었다. 도윤은 사방의 벽이 자신을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김도윤 씨는 참 변하지 않는군요. 숫자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오만함까지 말입니다."
박시온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품 안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유리 패널 위에 전자 펜이 닿자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최가을 역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서명란에 손을 올렸다. 완벽한 합의는 아니었다. 양 진영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릴 수 있는 모호한 예외 조항을 하나씩 끼워 넣은 뒤에야 마지못해 물러났다.
"이건 평화 조약 같은 게 아니야."
서명이 끝나자마자 최가을이 침을 뱉듯 내뱉었다. 그녀는 단말기 화면을 증오스럽다는 듯 노려보며 덧붙였다.
"잠시 서로에게 겨눈 총구를 내리기로 한 것뿐이지. 다음 겨울이 오기 전에 이 코드는 휴지조각이 될 거야. 내 장담하지."
도윤은 대답 대신 묵묵히 단말기를 회수했다. 짧은 전자음과 함께 홀로그램이 꺼지고 화면이 암전되었다. 모두가 떠나간 회의실에는 뼛속까지 시린 정적만이 고였다. 도윤은 테이블에 몸을 기대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납덩이 같은 무게가 아주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씻기지 않는 앙금이 남아 있었다.
임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무너진 가로등과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도윤은 자신의 불규칙한 발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숙소 건물은 비상 발전기가 돌아가는지 희미한 난방기가 가동되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서하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도윤의 엉망이 된 몰골을 확인하더니,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넸다.
"끝난 거예요?"
서하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날 선 활기 대신 깊은 수렁 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도윤은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아내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완전한 합의예요. 서로의 미간에 겨눴던 총구만 잠시 바닥으로 내린 수준이죠."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그냥 오늘 밤은 살아남았다는 거, 그거 하나에만 집중해요."
서하는 그렇게 말하며 턱끝으로 욕실 문을 가리켰다. 그녀는 미리 온수를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문틈 사이로 하얀 수증기가 몽글몽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윤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욕실을 향해 발을 뗐다.
욕실 안은 눅눅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피와 먼지에 찌든 옷을 벗어 던졌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낯선 이방인처럼 보였다. 눈 밑은 거뭇하게 죽어 있었고, 몸 곳곳에는 마법의 대가로 지불한 흉터들이 낙인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는 샤워기 아래에 털썩 주저앉듯 섰다.
처음 닿은 물줄기는 뜨겁다 못해 살을 찌르는 듯 따가웠다. 얼어붙어 있던 피부가 천천히 녹아내리며 화끈거리는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타일 바닥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가 규칙적인 박자를 만들며 귓가를 울렸다. 도윤은 차가운 벽을 짚고 서서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비누 거품이 몸을 타고 구정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전투 내내 폐부 깊숙이 박혀 있던 화약 냄새와 비린 피 냄새가 샴푸의 은은한 향기에 서서히 덮여갔다. 따뜻한 물줄기는 단순한 청결 이상의 행위였다. 그것은 야만의 전장에서 문명으로 돌아오는 귀환이었고, 비인간적인 마법의 세계에서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하지만 안식은 찰나였다. 샤워 도중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이 도윤의 시야를 덮쳤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며 심장 박동이 불규칙한 드럼 소리처럼 요동쳤다. 마법 과사용에 따른 전형적인 과부하 증상이었다. 도윤은 미끄러운 타일 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손톱이 벽을 긁는 소리가 자욱한 수증기 속에 묻혀 희미하게 들렸다.
"김도윤 씨? 괜찮아요? 안에 무슨 일 있어요?"
욕실 밖에서 서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 도윤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닻이었다. 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대답을 쥐어짜 냈다.
"괜찮습니다. 잠시... 어지러워서 그래요. 금방 나갑니다."
"빨리 나와요. 따뜻한 차 끓여놨으니까 식기 전에."
서하의 채근에 도윤은 간신히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했다. 그는 찬물을 틀어 얼굴을 거칠게 적셨다. 정신이 번쩍 드는 서늘함이 밀려왔다. 그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서하가 준비해준 깨끗한 면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욕실을 나서자 방 안에는 작은 램프 불빛만이 노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서하는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 두 개를 내려놓았다. 도윤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기분 좋게 전신으로 퍼졌다.
"오늘 당신이 아니었으면 아마 끝까지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도윤이 진심을 담아 나직하게 털어놓았다. 서하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다 멈칫하더니, 이내 싱긋 웃어 보였다.
"나중에 밥이나 사요. 아주 비싸고 맛있는 걸로."
"서울에 식당이 다시 문을 열면, 제일 먼저 그러죠."
"약속한 거예요. 내일도 이 도시에 계속 있을 거죠?"
서하의 질문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도윤은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유리 같은 평화가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까 봐. 도윤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겁니다. 이제 갈 곳도 없으니까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차가운 칼바람이 건물을 할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하가 먼저 잠자리에 들고 난 뒤, 도윤은 홀로 간이 침대에 기대어 단말기를 켰다. 푸른 화면이 어두운 방 안을 창백한 빛으로 물들였다.
그는 'final_agreement.json' 파일을 다시 열었다. 수천 줄의 코드와 조항들이 그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극심한 피로 때문에 글자가 자꾸만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는 집요하게 조항 하나하나를 훑어 내려갔다. 그러다 스크롤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파일의 가장 하단, 서명 직전에 교묘하게 끼워진 듯한 짧은 한 줄이 있었다.
`"emergency.override.access": "UNSPECIFIED_ROOT"`
도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특정 긴급 상황에서 시스템의 모든 제어 권한을 무력화할 수 있는 치명적인 예외 조항이었다. 협상 테이블의 홀로그램에서는 분명히 보지 못했던 문장이었다. 누군가 전송 직전이나 합의 과정에서 슬쩍 밀어 넣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피로에 젖은 눈을 비비며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척추를 타고 서늘한 공포의 눈사태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한 줄은 맹독이었다. 언제든 이 불완전한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다시 전쟁의 불씨를 지필 수 있는 최악의 뇌관이었다.
도윤은 수정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하지만 이내 멈췄다. 지금 이 조항을 문제 삼아 판을 뒤엎는다면, 방금 성사된 합의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양 진영은 다시 서로를 의심하며 무기를 들 것이고, 서울의 밤은 다시 핏빛으로 타오를 터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를 껐다. 화면이 꺼진 어둠 속에서, 그 한 줄의 문장이 망막 위에 잔상처럼 남아 괴롭혔다. 도윤은 침대에 몸을 눕히고 얼룩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샤워 후 채 닦이지 않은 물기가 목덜미를 타고 차갑게 흘러내렸다.
멀리서 희미한 발전기 소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것은 도시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이자, 동시에 언제든 심장이 멈출 수 있다는 경고처럼 들렸다. 도윤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다음 겨울의 전쟁이 이미 소리 없이 시작되고 있었다.
누가 이 조항을 넣었을까. 박시온일까, 아니면 최가을일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제3의 누군가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도윤은 스스로를 다독이듯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지금은 쉬어야 한다. 지금은 이 위태로운 안식이라도 필사적으로 붙잡아야 한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단말기의 작은 LED 불빛은 마치 거대한 폭풍을 예고하는 등대처럼 불안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서울의 마지막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더 거대한 추위를 몰고 오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