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31
Membaca
치직, 치직. 형광등의 불규칙한 점멸이 차가운 격리실 안을 조각내고 있었다. 김도윤은 눅눅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후벼파는 감각에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천장에 매달린 낡은 환풍기였다. 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갈 때마다 머릿속을 수천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그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신음했다. 지난밤 을지로에서 마력을 과부하 상태로 쏟아부었던 대가가 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잔류 진동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보았지만, 마치 눅눅한 진흙 속에 파묻힌 것처럼 감각이 무디고 무거웠다. 금속 침대 프레임의 서늘한 기운이 얇은 환자복을 뚫고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오한을 불러일으켰다. 공기 중에는 타버린 전선에서 날 법한 비릿한 오존 냄새가 희미하게 감돌았다. 도윤은 단순히 병원에 실려 온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벽면 모서리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의 렌즈가 기계적인 소음을 내며 그의 미세한 움직임을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키려 애썼다. 복부 근육이 뒤틀리는 통증과 함께 입안에서 쇠맛이 났다. 의도적으로 침대 옆 철제 트레이를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챙그랑!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찢어발기며 복도 멀리까지 파동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거기 누구 없습니까?"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지만, 초점만큼은 서늘하게 빛났다. 감시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역이용해 대면을 끌어내려는 계산이었다. 통계적으로 이런 폐쇄적인 환경에서 피험자가 소란을 피우면 관리자는 반드시 개입하게 되어 있었다. 천장이 조금씩 내려오는 듯한 압박감이 방 안을 채웠지만, 도윤은 숫자를 세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 분이 채 지나기 전에 두꺼운 철제 문 너머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문이 열리며 정돈된 제복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은은한 가죽 구두 냄새와 함께 겨울 외투에 밴 바깥의 찬 공기가 방 안의 정체된 열기를 밀어냈다. 박시온이었다. 그는 한때 도윤의 사수였던 시절과 다름없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 눈동자 뒤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계산이 깔려 있었다.
"김도윤 씨, 정신이 좀 듭니까?" 박시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침대 옆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도윤의 안색을 살폈다. "무모한 짓을 했더군요. 그 정도의 마력 방출은 일반적인 인간의 회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자칫하면 신경망이 타버렸을 겁니다."
도윤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배님이 저를 여기로 데려오신 겁니까? 시청 소속 분석가를 이런 식으로 가두는 게 원류파가 말하는 질서인가요?"
박시온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테이블 위에 태블릿 화면을 띄웠다. 푸른 빛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었다. "감금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도시수호파의 거친 손길에서 당신을 빼내 오는 데 꽤 공을 들였거든요. 우리는 당신이 본 그 '황금빛 문양'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태블릿을 도윤 쪽으로 돌려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서울 지하를 흐르는 고대 에너지의 흐름도였다. "이 도시는 거대한 기계와 같습니다. 하지만 부품들이 낡고 마모되어 이제는 멈춰야 할 때가 왔죠. 김도윤 씨, 당신은 그 기계의 설계도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눈을 가졌습니다. 우리와 함께 이 낡은 부품들을 갈아치워야 합니다."
도윤은 화면 속의 수치들을 분석적으로 훑어내렸다. 데이터상으로는 도시의 붕괴가 필연적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박시온의 제안 뒤에 숨겨진 의도를 놓치지 않았다.
"질서를 재구축한다는 명분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워져야 합니까? 선배님이 그리는 도면 위에 실제 사람들의 삶은 고려되지 않은 것 같군요."
박시온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선택해야죠, 김도윤 씨. 무너져가는 시스템을 억지로 붙들고 고통을 연장할 것인지, 아니면 잠시의 혼란을 감수하고 완벽한 새로운 세계를 세울 것인지. 당신의 데이터 분석 능력이라면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지 알 텐데요."
대화가 이어질수록 도윤은 가슴 속에 차가운 안개가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박시온의 논리는 정교했고, 반박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 합리성 속에는 인간의 온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전쟁이 누군가에게는 구조적인 이득이 되는 게임이라는 사실이 박시온의 정돈된 말투에서 묻어났다.
그때, 복도 끝에서 희미한 폭발음과 함께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박시온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김도윤 씨, 제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길 바랍니다. 우리는 당신 같은 인재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요."
박시온이 방을 나가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환풍구 쪽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덮개가 떨어져 나갔다. 그 구멍을 통해 날렵한 체구의 여성이 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이서하였다.
그녀는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도윤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요? 구하러 왔는데 인사도 안 해줄 거예요?" 그녀의 옷에는 흙먼지와 화약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도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이서하 씨가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그리고 저쪽은 원류파의 본거지 같은데… 너무 위험합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그냥 GPS 추적해서 들어온 거지." 이서하가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박시온 그 인간, 말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시커먼 거 알죠?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최가을 언니가 밖에서 대기 중이니까."
도윤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를 전적으로 믿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서하의 손은 박시온의 정중한 태도보다 훨씬 따뜻했다.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벽면의 감지 장치들이 붉은 빛을 내뿜으며 그들을 위협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도윤은 이서하에게 짧은 공조를 제안했다. "이서하 씨, 무작정 나가기보다 이 건물의 중앙 서버실을 거쳐 가야 합니다. 저들이 수집한 데이터에 제가 찾는 단서가 있어요."
이서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데이터 타령이에요? 순찰대가 코앞까지 왔는데!" 하지만 그녀는 도윤의 단호한 눈빛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딱 5분만 주는 거예요. 그 이상은 나도 책임 못 져요."
두 사람은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 좁은 설비 통로로 몸을 숨겼다. 차가운 금속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시야를 가렸고, 발밑의 콘크리트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경보 장치의 날카로운 전자음이 고막을 자극했다. 도윤은 긴장으로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서하는 벽에 귀를 대고 바깥 동태를 살폈다. "저기요, 김도윤 씨. 아까 박시온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그 사람, 당신을 꽤 탐내는 눈치던데."
도윤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새로운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더군요. 저를 설계자로 쓰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흥, 설계자 좋아하시네. 결국 자기들 입맛대로 도시를 주무르겠다는 소리잖아요." 이서하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우리 쪽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적어도 우린 사람을 부품으로 보진 않아요."
"정말 그렇게 믿습니까?" 도윤의 질문에 이서하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그런 거 따질 때 아니에요. 살아서 나가는 게 우선이지."
두 사람은 서버실로 향하는 도중, 폐쇄된 구내식당 구역에 도달했다.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리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도윤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근처 의자에 주저앉았다. 마력 과부하의 후유증으로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만요, 이서하 씨. 5분만 쉬었다 갑시다. 이대로는 서버실에 가기도 전에 쓰러지겠어요." 도윤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이서하는 그의 상태를 보더니 혀를 찼다. "진짜 약골이라니까. 기다려 봐요, 먹을 거라도 있는지 찾아볼 테니."
그녀는 주방 쪽으로 들어가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즉석 국밥 용기와 생수병을 찾아냈다. 하지만 조리용 온수기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도윤은 떨리는 손을 뻗어 기계의 전원부에 갖다 댔다.
"비켜봐요. 제가 해볼게요."
도윤이 집중하자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전기 회로를 직접 자극하는 미세한 마력 조작이었다. 기계가 덜컹거리며 낮은 웅웅 소리를 내더니, 이내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작은 승리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도윤의 손은 감각이 마비된 듯 저릿해졌고, 시야가 잠시 흐릿하게 번졌다. 마법의 물리적 비용은 언제나 정직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의 향이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갓 지은 밥 냄새와 뜨거운 국물의 온기가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공기를 조금씩 녹여냈다. 도윤은 입안을 데일 듯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삼켰다. 온몸에 퍼지는 따뜻함이 마비되었던 감각을 깨우는 것 같았다.
"맛있네요. 이런 곳에서 먹는 밥치고는." 도윤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서하도 국물을 들이켜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평소엔 쳐다도 안 볼 편의점 밥인데 꿀맛이네."
두 사람은 잠시 전쟁과 파벌의 논리를 잊은 채 묵묵히 식사에 집중했다. 식당 조명이 깜빡이며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벽면에 길게 늘어졌다. 이서하가 물병을 건네며 툭 던지듯 말했다. "김도윤 씨는 왜 이 일을 시작한 거예요? 시청 계약직이면 그냥 적당히 서류나 만지면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도윤은 숟가락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기상청 예보가 틀렸거든요.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그걸 다루는 사람들이 틀린 거죠. 그래서 제가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시스템이 완벽하다면 누구도 억울하게 죽지 않을 거라 믿었으니까요."
"시스템이라…." 이서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난 반대예요. 시스템이 너무 완벽해서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완벽한 선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버려지잖아요. 난 그 버려진 사람들을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도윤은 그녀의 말에서 진심을 읽었다. 도시수호파와 원류파, 두 집단은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결국 서울이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다. 다만 그 '지키는 방식'이 너무나도 폭력적으로 충돌하고 있을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식당 벽면에 설치된 모니터 화면이 갑자기 치직거리며 켜졌다. 붉은색 경고 문구가 깜빡이며 시스템 메시지를 출력하고 있었다.
[CRITICAL ERROR: SUBJECT-7 UNRESPONSIVE]
[INITIATING RECOVERY PROTOCOL...]
[RETURN JSON: TARGET_ID_UNIDENTIFIED]
도윤은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Return JSON… 결국 저를 찾는 겁니까?"
그는 홀린 듯 화면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단순한 프로그래밍 코드가 아니었다. 특정 대상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라는, 마치 누군가를 강제로 회수하려는 명령처럼 읽혔다.
"이게 뭐예요? 아는 코드예요?" 이서하가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저를 찾는 메시지 같습니다. 하지만 '대상 식별 불가'라니… 저를 단순한 데이터 패킷처럼 취급하고 있어요." 도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식당의 화재 경보기가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천장의 스프링클러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고, 조명이 붉은색으로 바뀌며 긴박함을 더했다. 멀리서 무장한 대원들의 거친 발소리와 통신음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젠장, 들켰나 봐요! 빨리 움직여요!" 이서하가 도윤의 팔을 잡아챘다.
두 사람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뚫고 식당을 뛰쳐나왔다. 복도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도시수호파의 잠입 부대와 원류파의 보안 요원들이 얽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총성 대신 마력이 부딪치는 파열음과 불꽃이 어두운 통로를 간헐적으로 밝혔다. 도윤은 혼란 속에서 박시온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김도윤 씨를 확보해! 상처 입히지 마라, 그는 핵심 자산이다!"
반대편에서는 최가을의 차가운 명령이 들려왔다. "김도윤 분석가를 선점해라. 원류파에게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양쪽 모두 그를 인간이 아닌 '자산'이나 '도구'로 부르고 있었다. 도윤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서하를 이끌고 계단 대신 환기 설비실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로 방향을 틀었다.
"이쪽입니다! 옥상으로 연결된 비상 통로가 있어요!" 도윤이 소리쳤다.
"미쳤어요? 옥상은 막다른 길이라고요!" 이서하가 반대했지만, 도윤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저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입니다. 옥상에서라면 최가을 팀장님의 지원을 받을 수도, 아니면 제3의 경로를 찾을 수도 있어요. 선택은 우리가 합니다!"
미끄러운 바닥과 협소한 통로를 지나며 도윤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젖은 시멘트 바닥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폐는 터질 듯이 가빠왔다. 뒤쪽에서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진영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고함을 질러댔다.
드디어 옥상으로 이어지는 철제 문이 보였다. 도윤은 온 힘을 다해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리며 한겨울의 칼바람이 안으로 들이쳤다.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도윤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양쪽 진영의 수색 조명이 교차하며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 단말기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여전히 그 기괴한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Return JSON: 대상 식별 불가. 수동 회수 모드로 전환.]
누가 자신을 되돌리려 하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가 대체 어디인지를 알 수 없었다. 도윤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나로 인해 진짜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김도윤 씨, 저기 봐요!" 이서하가 가리킨 곳에는 도시수호파의 헬기가 접근하고 있었다. 동시에 반대편 건물 옥상에서는 원류파의 저격수들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두 세계의 저울질 사이에서, 도윤은 난간을 꽉 쥐었다. 차가운 철제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도표 위에 그려진 데이터로 남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당장 들이닥친 선택의 순간 앞에서, 그의 발밑은 여전히 위태로운 낭떠러지였다.
밤하늘의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마지막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도윤은 옆에 선 이서하의 떨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것은 선택을 유예하는 몸짓이자, 동시에 자신만의 길을 열기 위한 처절한 저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