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 공기는 비릿했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포르말린 냄새에 연서경은 마른세수를 했다. 메스를 내려놓은 손등 위로 검은 반점이 맥박에 맞춰 꿈틀거렸다. 촛불이 일렁이자 벽면에 늘어진 그림자가 거대한 괴물처럼 몸집을 불렸다.
해부대 위에는 '다섯 번째 계절'의 잔해들이 담긴 표본병이 줄지어 있었다. 제국이 도려낸 역사의 파편들이었다. 서경은 충혈된 눈으로 검시 일지를 눌러 적었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정적을 찢는 비명처럼 들렸다.
"그만해."
어둠을 가르고 강진혁이 나타났다. 그의 어깨에 매달린 밤공기가 서늘했다. 진혁은 두꺼운 실크 외투를 벗어 서경의 어깨에 던지듯 덮어주었다.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그의 체온이 식어가는 살결을 파고들었다.
그가 해부대 구석에 약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쌉싸름한 향이 역한 약품 냄새를 밀어냈다. 서경은 대답 대신 찻잔을 감싸 쥐었다. 진혁의 손등에 남은, 자신보다 깊고 오래된 흉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가락이 떨려. 당신이 무너지면 이 기록도 끝이야."
진혁의 음성은 낮고 거칠었다. 그는 서경의 맞은편에 앉아 굳어버린 그녀의 손등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서경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온기가 마비된 감각을 깨웠으나, 손등의 반점은 여전히 불씨처럼 뜨거웠다.
"기록은 죽지 않아요."
서경이 펜을 고쳐 쥐었다.
"내가 숨 쉬는 한, 이것들이 증언할 테니까."
그때 진혁의 흐트러진 깃 사이로 은색 선이 번뜩였다. 목덜미에서 쇄골로 이어지는 기이한 절개 자국이었다. 서경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젖혔다. 진혁이 짐승처럼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으나 서경의 시선은 이미 그 흉터에 박혀 있었다. 단순한 부상이 아니었다.
"이 매듭, 이 봉합 방식…."
서경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우리 아버지의 인장이야. 당신 몸에 왜 이게 있지?"
흉터 끝부분에 연(延) 가문 특유의 '영혼 엮기' 흔적이 선명했다. 오직 그녀의 아버지만이 구사하던 비기였다. 진혁은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옷을 여몄다.
"보지 마.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건 진짜 비명이 될 테니까."
진혁의 눈에 서늘한 공포가 스쳤다. 그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인 기계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서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머릿속 파편들이 끔찍한 형상으로 맞춰졌다.
"아버지는 수술을 한 게 아니야. 당신을… 기워 만든 거군."
서경의 추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천장 환기구가 비명을 지르며 뜯겨 나갔다.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연기처럼 쏟아졌다. 그들의 손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화염병이 들려 있었다.
"태워버려라!"
괴한이 외치며 병을 내던졌다. 유리 파열음과 함께 불길이 해부실을 집어삼켰다. 쏟아진 포르말린 위로 화염의 바다가 펼쳐졌다. 서경은 비명을 지르며 선반으로 몸을 날렸다.
"안 돼!"
뜨거운 열기가 살을 핥았지만 그녀는 표본병들을 품에 안았다. 유리 파편이 뺨을 스쳤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혁이 검을 뽑아 들고 자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가운 마력이 검신에서 뿜어져 나와 불길을 갈랐다. 하지만 습격자들은 끈질겼다. 그들은 오직 증거 인멸을 위해 서경이 있는 선반만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바닥에 떨어진 표본병이 박살 나는 소리에 서경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포르말린에 젖은 장화가 바닥을 짓이겼다. 불길 속에서 칼날이 서경의 등을 노리고 쇄도했다. 그 찰나, 진혁이 그녀를 덮치듯 막아섰다.
"강진혁!"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때렸다. 칼날이 진혁의 가슴을 깊게 베었다. 인간이라면 즉사했을 상처였다. 그러나 그의 상처에서는 붉은 피 대신 검은 안개가 분출됐다.
피부를 고정하던 봉합선들이 투둑, 터져 나갔다. 몸 안에 갇혀 있던 마력들이 충돌하며 해부실을 뒤흔들었다. 서경은 그의 벌어진 상처 안쪽에서 수많은 이름이 새겨진 뼈 조각들을 보았다.
"이건 증거가 아니야. 나를 살리려 도살된 이들의 영수증이지."
서경은 깨달았다. 자신의 손등에 나타난 저주를 그가 대신 짊어지고 있었다. 진혁의 육신은 아버지가 설계한 '살아있는 장부'였다. 그녀가 진실에 다가갈수록 대가는 그의 육체를 갉아먹었다.
진혁의 몸 안에서 수십 명의 통곡이 겹쳐진 기괴한 진동이 울렸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서경을 감싼 팔을 풀지 않았다.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자객들을 벽으로 처박았다. 습격자들은 예상치 못한 위력에 당황하며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불길은 사그라들었으나 해부실은 폐허였다. 서경이 지키려던 표본들은 잿더미가 되어 공중을 부유했다. 바닥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마력 혈흔만이 고여 있었다. 모든 물증이 소멸했다.
서경은 피투성이가 된 진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 박동은 고장 난 시계처럼 불규칙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서경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가락 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를 보지 마. 당신이 관찰할수록 저주는 더 빨리 돌아갈 거야."
진혁이 쉰 목소리로 경고했다. 서경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절망보다 깊은 결의가 그녀의 눈동자에 서렸다. 이제 남은 유일한 증거는 눈앞의 이 남자뿐이었다.
"아니, 끝까지 볼 겁니다. 당신이 내 삶의 대가라면, 그 무게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할 테니까."
서경의 선언과 동시에 그녀의 손등에 있던 반점이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진혁의 상처로 옮겨붙었다. 관찰자의 인식이 시스템을 가동했다. 진혁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정신을 잃었다.
지하실 밖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의 시간은 여전히 십 년 전 그날에 멈춰 있었다. 서경은 불타버린 검시 일지의 잔해를 꽉 쥐었다. 거친 종이 질감이 현실을 일깨웠다.
최도윤이 노린 것은 단순한 증거 인멸이 아니었다. 그는 서경이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진혁이라는 방패를 스스로 파괴하게 만든 것이다. 가장 잔혹한 방식의 살인이었다.
"하온아, 거기 있니?"
서경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문밖에서 숨죽이던 박하온이 겁에 질린 채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해부실을 보고 입을 막았다.
"선생님… 대공 전하께서…."
"당장 정의찬 어르신께 가."
서경의 명령은 차갑고 명확했다. 그녀는 바늘과 실을 챙겼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이제 산 자의 육체에 진실을 새겨야 했다.
"서고 금기 구역의 '기증자 명단'을 찾아와야 해. 당장."
하온은 서경의 눈에 서린 서늘한 광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서경은 진혁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피부 밑에서 꿈틀거리는 마력의 흐름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당신은 죽지 않아. 내가 당신을 단순한 도구로 남겨두지 않을 거니까."
서경은 바늘을 들었다.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내뿜었다. 어둠이 몰려오기 전, 그녀는 진혁의 흉터 속에 숨겨진 마지막 글자를 읽어냈다. 그것은 그녀의 이름, 연서경이었다.
해부실은 잿더미가 되었고 물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는 지워진 자들의 조각으로 기워진,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증거인 강진혁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서경은 펜을 들었다. 종이가 없으면 자신의 살에라도 적을 기세였다. 제국의 역사가 지워버린 이름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진짜 전쟁의 시작이었다.
"기록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침묵을 찢었다. 진혁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때, 타오르는 증오와 슬픔이 뒤섞인 서경의 눈동자가 그를 맞이했다.
서경은 진혁의 목덜미에 새겨진 마지막 봉합선을 끊어냈다. 그 순간, 지하실 전체가 거대한 심장처럼 박동했다. 제국이 숨겨온 추악한 비밀이 한 남자의 육체를 찢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불타버린 연기 속에서 서경은 보았다. 벽면에 새겨진 폐 도식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그것은 지도가 아니라, 이 거대한 살육 기계를 멈출 설계도였다. 그녀는 그 설계도의 마지막 조각이 자신임을 깨달았다.
"가자, 진혁 씨. 우리가 끝내야 할 이야기가 남았어."
서경은 진혁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으나 그녀는 결코 그를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재와 연기로 가득한 지하실을 뒤로하고 지상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서 이설화가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피 묻은 서신이 들려 있었다. 최도윤의 인장이 찍힌 죽음의 초대장이었다. 서경은 서신을 낚아채듯 빼앗았다.
"이건 내가 받겠소. 이제부터의 기록은 내가 직접 쓸 것이오."
황궁의 새벽은 여느 때보다 붉었다. 태양의 빛이 아니라, 제국이 흘린 희생자의 피가 하늘에 닿은 듯했다. 서경과 진혁은 그 핏빛 새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발자국마다 검은 마력의 흔적이 남았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진실의 낙인이자, 제국을 무너뜨릴 도화선이었다. 이제 황궁의 모든 계절은 멈췄고, 오직 서경이 집도하는 마지막 해부만이 남았다.
"지켜보시오, 아버지. 당신이 남긴 이 살아있는 증거로 제국을 해부하겠소."
서경의 다짐이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최도윤의 집무실 창가에서 누군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서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진혁의 등 위에 새겨진, 비명을 지르는 진실의 지도만을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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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공기는 비릿했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포르말린 냄새에 연서경은 마른세수를 했다. 메스를 내려놓은 손등 위로 검은 반점이 맥박에 맞춰 꿈틀거렸다. 촛불이 일렁이자 벽면에 늘어진 그림자가 거대한 괴물처럼 몸집을 불렸다.
해부대 위에는 '다섯 번째 계절'의 잔해들이 담긴 표본병이 줄지어 있었다. 제국이 도려낸 역사의 파편들이었다. 서경은 충혈된 눈으로 검시 일지를 눌러 적었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정적을 찢는 비명처럼 들렸다.
"그만해."
어둠을 가르고 강진혁이 나타났다. 그의 어깨에 매달린 밤공기가 서늘했다. 진혁은 두꺼운 실크 외투를 벗어 서경의 어깨에 던지듯 덮어주었다.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그의 체온이 식어가는 살결을 파고들었다.
그가 해부대 구석에 약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쌉싸름한 향이 역한 약품 냄새를 밀어냈다. 서경은 대답 대신 찻잔을 감싸 쥐었다. 진혁의 손등에 남은, 자신보다 깊고 오래된 흉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가락이 떨려. 당신이 무너지면 이 기록도 끝이야."
진혁의 음성은 낮고 거칠었다. 그는 서경의 맞은편에 앉아 굳어버린 그녀의 손등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서경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온기가 마비된 감각을 깨웠으나, 손등의 반점은 여전히 불씨처럼 뜨거웠다.
"기록은 죽지 않아요."
서경이 펜을 고쳐 쥐었다.
"내가 숨 쉬는 한, 이것들이 증언할 테니까."
그때 진혁의 흐트러진 깃 사이로 은색 선이 번뜩였다. 목덜미에서 쇄골로 이어지는 기이한 절개 자국이었다. 서경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젖혔다. 진혁이 짐승처럼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으나 서경의 시선은 이미 그 흉터에 박혀 있었다. 단순한 부상이 아니었다.
"이 매듭, 이 봉합 방식…."
서경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우리 아버지의 인장이야. 당신 몸에 왜 이게 있지?"
흉터 끝부분에 연(延) 가문 특유의 '영혼 엮기' 흔적이 선명했다. 오직 그녀의 아버지만이 구사하던 비기였다. 진혁은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옷을 여몄다.
"보지 마.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건 진짜 비명이 될 테니까."
진혁의 눈에 서늘한 공포가 스쳤다. 그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인 기계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서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머릿속 파편들이 끔찍한 형상으로 맞춰졌다.
"아버지는 수술을 한 게 아니야. 당신을… 기워 만든 거군."
서경의 추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천장 환기구가 비명을 지르며 뜯겨 나갔다.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연기처럼 쏟아졌다. 그들의 손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화염병이 들려 있었다.
"태워버려라!"
괴한이 외치며 병을 내던졌다. 유리 파열음과 함께 불길이 해부실을 집어삼켰다. 쏟아진 포르말린 위로 화염의 바다가 펼쳐졌다. 서경은 비명을 지르며 선반으로 몸을 날렸다.
"안 돼!"
뜨거운 열기가 살을 핥았지만 그녀는 표본병들을 품에 안았다. 유리 파편이 뺨을 스쳤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혁이 검을 뽑아 들고 자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가운 마력이 검신에서 뿜어져 나와 불길을 갈랐다. 하지만 습격자들은 끈질겼다. 그들은 오직 증거 인멸을 위해 서경이 있는 선반만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바닥에 떨어진 표본병이 박살 나는 소리에 서경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포르말린에 젖은 장화가 바닥을 짓이겼다. 불길 속에서 칼날이 서경의 등을 노리고 쇄도했다. 그 찰나, 진혁이 그녀를 덮치듯 막아섰다.
"강진혁!"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때렸다. 칼날이 진혁의 가슴을 깊게 베었다. 인간이라면 즉사했을 상처였다. 그러나 그의 상처에서는 붉은 피 대신 검은 안개가 분출됐다.
피부를 고정하던 봉합선들이 투둑, 터져 나갔다. 몸 안에 갇혀 있던 마력들이 충돌하며 해부실을 뒤흔들었다. 서경은 그의 벌어진 상처 안쪽에서 수많은 이름이 새겨진 뼈 조각들을 보았다.
"이건 증거가 아니야. 나를 살리려 도살된 이들의 영수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