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폭주하는 마력, 얼어붙은 궁전
비명이 다시 터졌다. 해부실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높이였다. 목이 찢어지는 끝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음정.
연서경의 펜촉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 잉크가 콕 찍히더니, 물방울처럼 번졌다. 손끝에 힘이 빠졌다.
벽을 타고 진동이 올라왔다. 마룻장과 기둥, 숨길을 이루는 돌 틈 사이로 떨림이 엉겨 기어올랐다. 귓불 안쪽이 간질간질 울렸다.
"… 대공전 쪽입니다! 천천히— 아니, 급히!"
밖에서 숨찬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위병이었다. 문틀이 덜컹 떨리자, 등 뒤에 기대 두었던 기록장이 사각 하고 울었다.
"비명?"
연서경이 짧게 물었다. 펜을 잉크병 옆에 내려놓으며.
"예, 대공 전하께서… 마력 폭주 같—"
끝까지 듣지 않았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었다. 마룻장에 고여 있던 알코올 냄새가 훅 뒤집혔다.
"길을 여시지요."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높이였다. 속도만 달라졌다. 몸이 먼저 나갔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대공전 쪽으로 부는 기류가 비틀려, 한쪽으로만 쏠렸다. 코끝에 타는 쇠맛이 박혔다. 혀끝으로 오존이 스쳤다.
앞에서 근위병 둘이 허둥지둥 뛰었다. 철제 갑옷이 서로 부딪치며 짤그랑, 짤그랑. 그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잠금진은 풀었느냐."
연서경이 걸음을 늦추지 않고 물었다. 치맛단이 종아리를 때렸다.
"예, 형식상 봉인만… 그…"
앞선 병사의 말꼬리가 복도 바닥에 떨어졌다.
"형식상 봉인은 문양만 남기지, 효력은 없소."
연서경의 발이 더 빨라졌다. 수라간 쪽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고기 굽는 냄새가 어느 지점에서 뚝 끊겼다. 그 자리를 피와 금속, 뜨거운 공기 냄새가 밀고 들어왔다.
대공전 앞 복도 바닥은 벌써 얼룩져 있었다. 회색 돌 위에 서리가 낮게 깔려, 새벽 논바닥처럼 얇은 막을 이뤘다. 궁녀 둘이 멀찍이 붙어 서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근위대장이 팔을 쭉 뻗어 그들을 뒤로 밀어냈다. 숨소리가 거칠게 튀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문살 사이로 희끄무레한 빛이 안개처럼 새어 나왔다. 봄 연회장 천장에 떠 있던 에메랄드 조명과 비슷한 색이었다. 그러나 이쪽 빛은 단단했다. 얼음 결이 박힌 유리처럼.
"검시관 나리, 여기까지만… 안에서는 그 후…"
근위대장이 말을 고르느라 눈치를 봤다. 눈빛이 문과 그녀 얼굴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연서경은 그를 한 번 흘끗 보고, 시선을 곧장 문틈으로 옮겼다. 문지방을 넘어오는 공기가 살갗을 얇게 긁었다. 바람은 없는데,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
"대공 전하께서 안에 계시옵니다. 마력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말을 잘랐다. 숨을 한 번 짧게 들이켰다.
"검시가 아니어도, 상태는 확인해야겠지요."
근위대장의 어깨가 귀 근처까지 올라갔다가, 우두둑 내려앉았다. 복도 끝 어디선가 "형조에서 책임 못 진다"는 낮은 투덜거림이 흘러왔다.
연서경은 대답 대신 문을 밀었다. 차가운 금속 손잡이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살을 찌르는 냉기가 손등을 타고 훅 뛰어올랐다.
대공전 침실.
방 안 공기는 계절이 뒤집힌 것 같았다. 벽난로에는 꺼진 재만 남았는데, 숨을 쉬면 뜨겁고, 피부에는 차가웠다. 귀 안쪽이 따끔거릴 정도로 오존 냄새가 진동했다. 공간 한가운데 기류가 소용돌이치며, 눈에는 안 보이는 나선형을 그렸다.
강진혁은 창가에 서 있었다. 창틀을 어깨로 밀어 받치는 자세였다. 등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한 손은 옆 벽을 거칠게 긁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얼음처럼 얼어붙은 마력이 튀어 나와, 석고벽에 살을 벗긴 듯 얕은 자국을 이어갔다.
"… 닥쳐. 조용히 하라고."
목소리가 낮게 새었다. 그러나 한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음색이 겹겹이 포개져 울렸다. 쉰 중년 남자의 목, 떨리는 아이의 숨, 높은 여자 목청, 갈라진 노인의 호흡이 한 입에서 동시에 나왔다.
연서경의 발목이 잠깐 멈췄다. 신발코 앞에서 서리가 가느다란 가시처럼 일어났다. 발등 위로 서늘한 기운이 올라타 척추까지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姜鎭赫."
그녀가 이름을 불렀다. 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어깨가 번개 맞은 듯 팍 튀었다. 천천히, 아주 어렵게 고개가 반쯤 돌아왔다. 눈동자는 평소의 잿빛이 아니었다. 동공 가장자리를 따라 에메랄드빛 고리가 돌아갔다. 빛 같기도 했고, 빽빽한 작은 글자들을 둥글게 새겨붙인 것 같기도 했다.
"연… 다시… 서… 경."
세 글자가 입을 빠져 나올 때마다, 혀가 각기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 온 것처럼 따로 놀았다. 세 사람이 동시에 말하다가, 겨우 한 문장으로 맞춰지는 것 같았다.
"선생님!"
뒤에서 박하온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헐떡이며 방 안으로 한 발 드리밀다가, 코를 틀어막았다.
"냄새… 선생님, 여기 공기가—"
"나가 있어."
연서경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눈은 강진혁에게 박아둔 채 말했다.
"문턱까지만. 누가 안으로 들어오려 하면 막으시고."
박하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이 잠깐 흔들렸다가, 고개를 꾸욱 끄덕였다. 다시 뒤로 물러나 문틀에 등을 붙이고, 두 팔을 양옆으로 쫙 벌렸다.
강진혁의 발이 한 번 비틀렸다. 균형이 무너졌다. 방 한가운데로, 털썩. 무릎이 돌바닥을 찍었다. 마른 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머리…"
손이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손등 위 힘줄이 새끼 뱀처럼 툭툭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이마 위로 붉은 핏줄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안쪽이 잘게 간 얼음가루로 긁히는 느낌이 들었다. 목 안이 서릿발에 갈리는 것처럼 따가웠다.
연서경은 방 구조를 눈으로 훑었다. 침대 위치, 창, 벽난로, 강진혁과 자신 사이의 거리. 한 걸음, 두 걸음. 어디까지 가까이 갈 수 있는지, 눈금 재듯 계산했다.
"편두통입니까."
입 안에서 나온 질문은 평소 검사 때 쓰던 톤 그대로였다. 메모를 옮겨 적는 듯 건조했다.
"… 아니야."
그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공중 어딘가를 잡으려 흔들렸다.
"들려. 또. 다 같이."
그의 목소리. 아니, 그 안에 섞인 여러 목소리들이 흔들렸다.
"오늘 죽은 놈들. 사흘 전에 지워진 여자. 열두 해 전 북부 요새에서 통째로 사라진 소대… 그래서 다 같이 떠들어."
공기에서 미세한 속삭임이 일었다. 바람도 없는데 귓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언어의 형태도, 노랫말도 아닌 것들이 겹겹이 들어왔다. 의미를 잡기도 전에 흩어졌다.
"꺼내 줘…"
"목이…"
"여기가… 어디…"
연서경은 그 단편들을 알고 있었다. 검시대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들었던 조각들. 죽은 자들의 마지막 단어가 뭉개진 형.
"姜鎭赫."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발뒤꿈치로 바닥 서리를 밟아 으스러뜨렸다.
"대답하시오. 누구 목소리입니까."
웃음이 튀어나왔다. 숨 막힌 웃음이었다. 목 안에 피를 품은 사람의 웃음. 혀끝으로 쇠맛을 굴리는 듯한 짧은 소리.
"네가… 다음으로 잘 알지 않냐."
고개가 들렸다. 눈동자는 여러 겹의 색으로 연서경을 꿰뚫었다. 짙은 갈색이 한 겹, 희미한 황금빛이 또 한 겹, 그 안쪽으로 새까만 동그라미가 또렷했다. 여러 사람의 눈이 한 구멍 뒤에서 순서 없이 들여다보는 것처럼.
"검시관 나리."
말투가 바뀌었다. 상민 특유의 씹힌 발음이 혀끝에서 굴러 나왔다.
"보고서, 잘 봤소."
연서경의 왼손이 소매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 주먹이 쥐어졌다.
"누구요."
짧게, 꺾어서 물었다.
"어제 해부한… 그 하급 관리."
강진혁의 입꼬리가 작게 경련했다.
"폐가 모래처럼 부서지고, 그 틈마다 녹색 살점이 매달려 있던 놈."
어제 검시대 위에서 적었던 문장이 머릿속에 그대로 떠올랐다. ‘폐 조직은 마른 흙처럼 갈라져 있고, 계절 마력 응고체가 에메랄드빛으로 매달려 있음.’ 종이에 박힌 글자는 잉크로만 존재했다. 객관, 관찰, 결과.
지금 그 문장이, 살아 있는 사람의 입에서 살아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술은 형편없더군."
강진혁의 오른손이 허공을 휘갈겼다. 마력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눈에 보이는 칼날은 없었지만, 공기가 갈라지며 궤적을 그렸다. 한순간, 어제 검시실에서 본 상처의 각도와 궤적이 겹쳤다.
시신의 목을 정확히 그어 간 암기의 방향. 그 선하고 똑같았다.
연서경은 몸을 살짝 틀었다. 귀 옆으로 얼음 냉기가 쓱 지나갔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공중에서 뚝 부러져 떨어졌다. 잘린 끝이 허공에서 반짝였다.
뒤에서 박하온의 비명이 튀었다.
"선생님!"
그 소리가 방 안의 오존 냄새를 흔들었다. 공기가 일순간 찢기는 느낌이었다.
"당신 검술이 아니라?"
연서경이 짧게 쏘듯 내뱉었다. 공격 대신, 질문을 던졌다.
"어제 죽은 놈 거."
강진혁이 툭, 뱉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보폭은 어설펐다. 훈련된 군인의 리듬이 아니라, 처음 칼을 쥔 사람의 불규칙한 움직임. 그러나 팔이 휘두르는 궤적만큼은, 어제 시신에서 재어 본 각도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몸이… 바로 그때 빌려 온다."
혀가 단어를 씹듯 말했다.
"머리가 꽉 차면. 넘친 것들이."
관자놀이 쪽 피부가 불그스름하게 벌어지더니, 그 사이에서 빛이 스며 나왔다. 머리카락 틈 사이로 얇은 에메랄드가 흐르는 것처럼. 두개골 안쪽에 잉크를 부어 놓고, 틈마다 새어 나오는 모습.
"제국에서 '삭제'한 것들."
이번에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끝마디마다 다른 사람 목소리가 살짝 달라붙어 꼬리를 이었다.
"재판 기록 없는 처형, 이름 없는 실험체, 반역자로만 남겨진 북부 병사들… 다 여기 있다."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네 개의 굵은 자국이 살 위에 파였다. 손톱 밑으로 붉은 피가 얇게 번졌다.
연서경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기록. 삭제. 이름 없는 자들. 황실 서고 ‘지워진 계절’ 구역에서 넘겼던 빈 페이지들이 머릿속에서 돌처럼 맞물려 들어갔다.
‘성유물.’ 단어 하나가 혀 밑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입술을 넘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온 말은 하오체였다. 낮고 담백한 톤.
"누가 당신 머릿속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강진혁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숨소리가 들쑥날쑥, 잘린 줄처럼 이어졌다. 머릿속에서 들리던 가느다란 속삭임이 더 거세게 몰려왔다.
"황제?"
"좌의정?"
"형조판서?"
여럿의 목소리가 한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오며 이름들을 긁어냈다. 그러다 칼로 잘라낸 듯, 한꺼번에 끊겼다.
짧은 정적이 방 한가운데 고였다.
마력은 스프링이 최대치로 눌린 것처럼 떨렸다. 공기 자체가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리는 느낌. 지금 이 상태에서 누군가 무심코 건드리면, 폭발이든 붕괴든 어느 쪽으로든 쏠릴 수 있는 지점.
연서경은 숫자를 세듯 따졌다. 거리, 두 걸음 반. 그가 완전히 폭주하기 전에 다가갈 수 있는 숨. 자신의 피부가 견딜 수 있는 냉기의 깊이.
"선생님, 들어가면 안 돼요!"
문 쪽에서 박하온의 떨리는 소리가 날아왔다.
"그, 마력 다 튀어요! 이건—"
"검시를 포기하라는 말이냐."
연서경은 아직도 뒤를 보지 않았다. 눈빛이 강진혁의 옆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말투는 해부실에서 시신을 향해 말하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낯선 사람의 몸 상태를 읊조리듯 건조했다. 그러나 발은 이미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닥의 서리가 발목을 잡아당기듯 달라붙었다. 한 발. 두 발. 숨을 쉴 때마다 폐 안쪽 얼음이 더 깊이 박혀 들어갔다. 숨결마다 목구멍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공기 속 오존의 금속맛이 혀 위에 얇게 깔렸다.
"姜鎭赫."
이제 거의 바로 뒤였다. 그녀는 숨을 짧게 고르고 손을 들어 올렸다.
피부가 먼저 반응했다. 팔 안쪽에 소름이 잔잔하게 돋았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뻗는 일. 평생 피하려 했던 동작. 검시관의 손은 보통 죽음에서 출발했다.
지금 이건 예외였다. 접촉이라기보다, 진정. 돋보기 대신 손바닥을 쓰는 순간.
"집중하시오."
그녀가 그의 귀 뒤쪽에서 낮게 말했다.
"당신 이름만 생각하시오."
손이 그의 목과 어깨 사이를 더듬어 자리를 찾았다. 닿는 살은 뜨겁고 차가웠다. 한쪽은 불에 덴 듯, 다른 쪽은 얼음장. 손가락 마디가 잠깐 얼어붙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관절이 삐걱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꺼내 줘…"
"찢어…"
"숨을…"
죽은 자들의 소리가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 들었다. 해부실에서 시신에 손을 대던 순간마다 들리곤 하던 환청. 그때와 똑같은 음색들인데, 이번에는 냉기 깔린 돌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살에서 직접 흘러나왔다.
"들려…?"
강진혁의 목소리가 헐떡이며 깔렸다.
"네가… 듣던, 그거. 원래… 여기에 있었던 거다."
연서경은 팔에 힘을 더 줬다. 그의 상체를 뒤에서 끌어안듯 잡아 고정했다. 가슴과 등 사이로 심장 박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의 심장이 저미듯 튀었다. 박동이 자신의 목 아래까지 전해져, 목안이 쿵쿵 울렸다.
"숨 쉬시오."
그녀가 그의 귀 옆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들숨, 날숨. 내 박자에 맞추시오."
"… 네가, 언제부터 의사가 됐냐."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려 했지만, 곧 찢어진 듯 일그러졌다.
둘이 동시에 호흡을 맞췄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셋, 넷, 다섯. 각각의 호흡에 맞춰 방 안을 휘감던 마력 소용돌이가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살을 찢지는 않았다.
"안 돼…"
강진혁의 손이 허공을 더듬다가, 뒤로 돌아와 연서경의 팔을 꽉 붙잡았다. 손가락 힘이 지나치게 세서, 살갗이 납작해질 만큼 눌렸다.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멀어지지 마. 나, 지금… 갑자기 나 혼자 아니야."
그 말 끝에, 또 다른 목소리가 포개졌다. 어린아이 목소리. 기침 뒤에 남는 가느다란 숨소리.
"… 아버지, 여기 어두워."
연서경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피부에 차갑게 들러붙는 땀방울이 느껴졌다. 손목에 저도 모르게 힘이 더 실렸다.
"조용히."
말이 튀어나왔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호했다. 팔 안의 남자에게인지, 그의 머릿속에서 웅성대는 셀 수 없는 사람들에게인지.
마력의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머리카락 끝에 붙어 있던 서리 알갱이가 하나둘 떨어져 녹았다. 숨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방금 전처럼 뒤틀리지는 않았다.
"… 선생님, 괜찮으세요?"
문 쪽에서 박하온이 다시 조심스럽게 불렀다. 발끝으로 몸을 앞으로 당기며.
"아직 보고 중이네."
연서경이 짧게 답했다.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들어오지 말라 했지요."
강진혁의 몸이 팔 안에서 무게를 더했다.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새어나가던 빛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허리… 놓는다."
연서경이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천천히."
둘이 같이 무게를 옮겼다. 침대 쪽으로, 한 걸음씩. 침대 매트리스가 푹 꺼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오래 눌린 자리의 퀴퀴한 약초 냄새와 땀 냄새가 동시에 올라왔다.
강진혁은 침대에 반쯤 기대며 눈을 감았다. 가슴이 들쑥날쑥 움직였다. 마력 소용돌이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공기 속 오존 냄새도 희미해졌다. 대신 식은땀, 피, 숨 냄새. 사람 냄새가 진해졌다.
"… 머리, 조심스럽게… 갈라지는 줄 알았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한 사람의 음색이었다. 그 특유의 쉰 톤만 남았다.
"마력 폭주가 아닙니다."
연서경은 그의 이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손바닥으로 축축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렸다. 이마에 닿는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보 과부하시지요."
"뭐?"
눈꺼풀이 반쯤 올라갔다. 흐린 눈동자가 느리게 그녀 얼굴을 찾았다.
"피해자들의 기록입니다."
연서경은 손등으로 그의 이마를 눌렀다. 온기가 손등뼈까지 파고들었다.
"당신 두개골 안에, 제국이 지운 자들의 모든 데이터를 쑤셔 넣은 듯합니다."
"성유물."
강진혁이 이를 깨물듯 말했다.
"북부에서 듣던 말이지. 무덤을 대신하는—"
말이 중간에 끊겼다. 혀가 굳어 붙은 듯 멈췄다.
그의 입에서 희미한 향이 새어났다. 싸구려 향수 냄새. 연서경은 그 향을 알고 있었다. 어제 하급 관리의 옷깃에서 맡았다. 사흘 전 검시한 궁녀의 손수건에서도 똑같은 냄새가 났다. 값싼 꽃향이 피와 약 냄새 사이에 끼어 있다가 사라지지 않던.
"… 당신은 제국의 영웅이 아니었어."
문장이 목구멍에서 그대로 만들어졌다. 날카롭게, 군더더기 없이.
"그저, 성유물이지요."
눈동자가 번쩍 떴다. 침실의 어둑한 빛 속에서 그 시선이 순간 칼날처럼 반짝였다.
"쓰레기통."
강진혁이 대신 마무리했다.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제국이 지운 것들, 다 퍼 담아두는…"
웃음이 길지 않았다. 곧 기침으로 찢겼다. 입가에서 하얗게 피 거품이 일었다.
연서경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헝겊을 집어 들었다. 입가를 정성스레 닦았다. 젖은 천에서 피와 땀, 약초, 희미하게 남은 오존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언제부터였소."
필요한 것만 물었다. 감정 없는 목소리로.
"십 년 전, 북부 전장."
그는 눈을 천장에 고정한 채 말했다.
"황실… 곧 사제가 와서. 폐에 뭐, 심었다고 했지. 이걸로 전쟁 끝난다고. 반역자, 죄인, 필요 없는 놈들… 나한테 맡기겠다고."
"장기 저장소."
헝겊을 쥔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물기를 다시 입가로 옮겼다.
"네 보고서랑 똑같네."
그가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마력 조직, 응고체, 에메랄드빛, 변형 각도. 네가 시체에서 꺼내는 것들. 원본이 여기 있나 보지."
퍼즐 조각들이 제 위치를 찾는 소리가 뇌 안에서 들리는 듯했다. 계절마다 되풀이되던 그의 두통. 계절 살인이 벌어진 밤마다 쌓이던 시신들. 검시대에 올려진 몸에서 발견한 증상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연서경의 귀에 들리기 시작한 죽은 자들의 속삭임.
모든 것이 이 한 사람을 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의 축이 이 방 천장에 박힌 듯했다.
"… 그럼에도 나 때문이라는 소리냐."
그가 낮은 톤으로 물었다. 문장은 짧았지만, 안에 섞인 것들은 많았다. 분노, 혐오, 체념, 피로. 그러나 눈동자는 바닥을 향하지 않았다. 정면을 봤다. 연서경의 얼굴을.
"당신 의지가 아닙니다."
그녀는 그 차이를 분명히 나눴다.
"제국 시스템 때문입니다."
"위로 고맙네."
그가 코웃음을 쳤다. 목 근육이 살짝 떨렸다.
"결론은 같지. 내가 넘칠 때마다, 밖에 시체가 생기는 거."
연서경의 목덜미 위로 한기가 기어올랐다. 그동안 자신이 해부해 온 죽음들이, 이 사람 한 명의 과부하로 쏟아진 것이라는 사실이 목 뒤를 찍었다.
"선생… 님."
문 쪽에서 박하온이 다시 불렀다. 눈에 물기가 맺힌 소리였다.
"조금, 나와 보실래요? 형조에서…"
"들어오라 했느냐."
연서경이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한마디가 칼처럼 날아갔다.
박하온은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곧 입술을 다물고,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선생님 손이… 게다가 파래요."
그 말에 연서경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등이 약간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피부 밑에 얇은 얼음줄기가 스며든 사람처럼.
"조금만."
그녀는 자리를 지킨 채 말했다.
"수건을 더 가져오시오."
박하온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복도 저편으로 달려가 물을 데우는 소리가 금속과 함께 멀어졌다.
잠깐의 고요가 방 안에 내려앉았다. 벽시계 초침이 탁, 탁, 시간을 찍었다. 숨소리와 섞여 긴 실처럼 이어졌다.
"연서경."
강진혁이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이 이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체와 기록이 끼어 있는지.
"나, 해부해 줘."
그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속눈썹이 떨렸다. 어둠 속 작은 날개처럼.
"내 안에 있는 놈들, 꺼내 줘. 네 방식대로. 기록이든, 칼이든. 뭐든."
연서경의 손등에 힘줄이 떠올랐다. 수건을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살아 있는 자의 해부는, 내 권한이 아닙니다."
해부실 벽 앞에서 수천 번 읊어 왔던 문장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입 안에 익숙하게 굳어 있는 방패 같은 문장.
"황실 검시관이잖아."
그가 씩 웃었다. 입가만, 조금.
"황제 사인도 네가 찍는다더니. 나 하나 못 갈라 보냐."
"허가가 필요합니다."
말은 여전히 평탄했다.
"당신이 아니라, 시스템의."
"시스템이 문제라며."
그가 다시 기침을 했다. 피 몇 방울이 입가를 타고 더 흘러내렸다.
"시스템 허가 기다리다, 또 몇 백 명 죽겠지."
눈동자가 천장에서 내려와 그녀를 잡았다. 그 시선은 벼랑 끝도, 바닥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맑고 또렷했다.
"내 안에 갇힌 놈들, 네가 제일 잘 아니까."
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간 해야 될 일이다. 지금이든, 나중이든."
연서경의 목 뒤로 뜨거운 열이 훅 치솟았다. 분노도, 공포도 아니었다. 결정을 요구하는 열, 방향을 선택하라고 등을 밀어붙이는 온기.
"제국이 당신을, 살아 있는 증거실로 만들었군요."
그녀가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성유물, 증거실, 쓰레기통."
그가 어깨를 아주 살짝 들썩였다.
"이름만 다르지."
문 밖에서 물 끓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전자 뚜껑이 들썩이는 소리가 조급하게 울렸다. 시간마저 그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것 같았다.
연서경은 일어나 수건을 물에 적셨다. 뜨거운 김이 푸른빛 도는 손등을 부드럽게 스쳤다. 얼어붙어 있던 피부 색이 조금씩 돌아왔다.
수건을 짜 물을 떨구고, 그의 이마 위에 올렸다. 따뜻한 물기가 피부를 타고 흘러 내렸다. 피와 땀 사이로 스며들어 관자놀이와 눈가를 타고 내려갔다.
"잔다."
그녀가 짧게 말했다.
"잠이 오냐, 이 상황에서."
그가 코끝으로 웃었다. 그러나 눈꺼풀은 이미 무거워져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마력 진정 후, 뇌와 폐 기능을 확보하려면 휴식이 필요합니다."
의학 교본에서 그대로 꺼낸 문장이었다. 감정을 감추기에 언제나 쓸모 있는 언어.
"네 목소리, 진정제 같네."
그가 속삭였다.
"계속… 떠들어 줘."
그 말에 연서경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수건 모서리로 그의 관자놀이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형조에서 검시 기록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 일도, 당신 상태도."
"쓸 거잖아."
그가 거의 잠에 빠져들며 중얼거렸다.
"네가 본 그대로."
"그렇습니다."
숨이 아주 조금 걸렸다.
"숨긴다면, 당시 황실 검시관 자격을 버리는 것이니까요."
"좋네."
입꼬리가 다시 아주 살짝 움직였다.
"나도, 이 꼴을 만든 놈들 기록 남겨야 하니까."
그의 손이 허공을 더듬다가 이불 위에 털썩 떨어졌다. 움찔거리던 손가락이 조금씩 느려지다 멎었다.
이불 너머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방금 전의 폭주는 지워지고, 일정한 박자. 규칙적인 생존의 리듬.
연서경은 한동안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수건이 식어갈 때마다 다시 데운 물에 적셔 이마에 올렸다. 그 사이에도 귀 안쪽에서는 여전히 미세한 목소리들이 윙윙거렸다.
"여긴… 춥다…"
"빛…"
"기록… 먼저…"
죽은 자들의 목소리.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들이 향하던 곳이 어디였는지.
검시대 위 차가운 돌판이 아니라, 이 사람의 두개골 깊숙한 안쪽.
문이 살짝 열렸다. 박하온이 고개만 쑥 내밀었다. 눈가는 벌겋게 달아 들어 있었다.
"선생님…"
목소리가 작게 갈라졌다.
"드디어 형조에서—"
"조용히."
연서경이 손을 들어 보였다. 박하온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은 방 안을 재빨리 훑었다. 창백하게 누워 있는 강진혁, 이마에 올려진 수건, 바닥에 얼어붙은 서리 자국. 그리고, 소매 끝에서 조금 보이는 선생님의 푸른 손.
"형조판서 윤성호 대감이 오신대요."
박하온이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검시 기록, 보겠다고."
연서경의 손가락이 수건을 쥔 채 멈췄다.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여기로 올까?"
"예. 이미 복도까지…"
박하온이 뒷말을 삼켰다.
윤성호. 사람보다는 숫자를 먼저 보고, 숫자 위로 떨어지는 좌의정의 잉크 색부터 살피는 자.
"대공전 침실에는 들이지 말라 하시오."
연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매를 아래로 당겨 파랗게 물든 손을 가렸다.
"해부실에서 기록을 보여 드리겠다고 해라."
"대공 전하 상태는 뭐라고—"
"기록 중이라 하시오."
그녀가 끊었다.
"죽은 자들 기록과 함께."
문턱을 넘으려는데 발목이 잠깐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이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감각.
몸을 아주 조금 돌렸다. 침대 머리맡 그림자가 길게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벽에 박힌 촛불이 약하게 떨리며, 그림자의 모양을 일렁이게 했다.
그 안에서, 손 같은 형상이 하나 꿈틀거렸다. 여러 개의 손가락이 서로 얽혀 있는 듯한 모양. 짧게, 그러나 또렷하게 움직였다.
"… 이번에는."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어제 해부실에서 피를 토하던 하급 관리의 목소리였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마지막에 남은 음색.
"드디어 나를 찾아냈구나, 검시관."
연서경의 손이 문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가락 뼈를 타고 삐걱 소리를 내며 울렸다.
침대 위, 아직 따뜻한 몸. 그 안에 덕지덕지 붙은 제국의 삭제 기록들. 살아 있는 성유물. 살아 있는 증거실.
지금부터 쓰게 될 검시 보고서 한 장이, 앞으로 이어질 계절 살인의 방향을 얼마나 비틀어 놓을지.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공백 위에 글자를 다시 적게 만들지.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윤성호의 기름 낀 웃음소리가 아직 보이지 않는 모퉁이에서부터 스며들었다.
연서경은 문을 열고 나섰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해부실이었다. 그러나 오늘 올라갈 것은 시신이 아니라, 제국이 숨겨 온 시스템 그 자체였다.
문이 닫히는 찰나, 침실 안 그림자가 살짝 움직였다.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몸을 낮추고 기다리는 형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