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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짐승의 입을 지나, 황궁으로

황궁의 정문은 입을 꼭 다문 짐승 같았다. 금장 박힌 문판이 흐린 아침빛을 비스듬히 받으며, 말라붙은 비늘처럼 누렇게 빛났다. 연서경은 목깃을 한 번 쓸어 올리고, 숨을 깊게 집어삼켰다. 차가운 공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혀끝에 쇠맛이 얇게 감겼다. 문 위에 줄지어 매달린 창과 검에서 스며 나온 냄새였다. 또각. 또각. 강진혁의 군화가 대리석을 찍었다. 규칙적인 리듬이 허공을 자른다. 그 소리에 맞추려 연서경이 발을 넓혔다. 망토 자락이 뒤에서 조용히 끌렸다. 머리 위, 창 든 근위병들이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보폭 맞춰." 앞을 보지도 않은 채, 강진혁이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소리가 공기 속에서 거칠게 갈렸다. 연서경은 말 대신 턱만 끄덕였다. 허리와 어깨를 곧게 세우고 한 걸음을 더 크게 내디뎠다. 머리 뒤까지 시선이 꽂히는 느낌이 등뼈를 따라서 올랐다. "대공 전하." 왼편 문루에서 근위대장이 허리를 기울였다. 은갑이 맞부딪혀 딱, 하고 짧게 튀었다. "입성 보고는 나중에 하셔도… 오늘은 연회도 준비 중이니…" "오늘은 장례부터다." 한 줄로 잘려 나간 말이 공기 중간을 똑 부러뜨렸다. 대리석에 부딪힌 후, 묵직한 울림이 되돌아왔다. 근위대장의 입술이 잠깐 말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혀끝이 입가를 한 번 훑고 지나간 뒤에야, 굳은 웃음이 애매하게 얼굴에 붙었다. "소문은 벌써 퍼졌습니다. 황궁 안 일이다 보니… 민심도 있고, 체면이라는 게…" "시체가 한 구 누워 있는데, 먼저 챙길 게 체면이냐." 마른 나뭇가지를 꺾듯 툭, 말이 떨어졌다. 근위병 몇 명이 헛기침으로 그 말을 덮으려 했다. 창 자루를 쥔 손가락에 힘줄이 더 도드라졌다. 연서경은 슬쩍 시선을 옮겨 남쪽 성벽 위 화살구멍들의 간격을 재듯 훑었다. 일정했다. 멀리 던질 것은 없지만, 숨을 만한 턱은 있었다. 문 아래로 내려온 근위병 하나가 연서경을 노골적으로 내려다봤다.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훑었다. 콧방귀가 짧게 튀었다. 입꼬리가 비틀렸다. "여인입니까? 그것도 검시관이라더군." 그가 씹듯이 말했다. "천한 손으로 황궁 문턱을 더럽히겠네." 연서경의 속눈썹이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얼굴선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황궁 문턱이 더러워질 만큼, 애초에 깨끗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듯하오." ‘하오’ 끝음이 낮게 가라앉았다. 근위병의 눈이 번쩍 치떴다. "감히—" "입 닫아라." 이번엔 군화 소리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쇳소리가 대리석에 닿으며 한 톤 낮아졌다. 강진혁이 어깨를 비스듬히 틀어, 자기 망토 그림자 안으로 연서경을 밀어 넣었다.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전장에 짐을 옮기듯, 위치만 바꾸는 손놀림. "이 여자는 황제가 내게 붙인 검시관이다." 그가 숨 돌릴 틈을 안 주며 이어갔다. "내 배우자이기도 하고." 창끝 같던 시선들이 한 번에 방향을 바꿨다. 경멸에서, 계산으로. 근위대장의 미간이 안으로 깊게 찌푸려졌다. "대공비… 또 한 번이십니까." 말끝이 가볍게 떨렸다. "허면, 의전 절차를—" "절차는 나중에 글로 써 붙여라." 강진혁의 눈동자가 문루 위를 훑었다. "오늘 우선은 죽은 자의 절차다." 연서경은 옆에서 조용히 장면을 정리했다. 문 기둥 그림자에 숨어 선 궁인 둘. 손에 들린 은쟁반, 그 위에 봉인된 편지 봉투. 경비 배치는 균일했지만, 지나치게 차고 넘치는 곳이 있었다. 서쪽 회랑으로 이어지는 복도에 경비가 과하게 몰려 있었다. "연회장은 서쪽이오?" 연서경은 근위대장이 아니라 뒤편에 서 있던 하급 병사에게 물었다. 병사는 어깨를 움찔했다. 눈동자가 허공을 한 바퀴 굴렀다. "예, 마마. 서쪽 회랑 끝 큰문입니다." "피는 어디에서 흘렀소."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병사의 눈이 멈칫했다.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되짚는 듯, 손가락이 허공 위를 더듬었다. "무대 앞, 중앙 제단 쪽이었습니다. 조용했는데…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합니다." "'갑자기' 같은 말은 기록에서 빼시오." 연서경이 짧게 잘랐다. "실제는 하나도 안 남고, 변명만 남으니." 근위대장이 억지 웃음을 흘렸다. 어색한 기침이 뒤섞였다. "검시관이란 게, 다 저리 말이 센가 보군." "죽은 자는 변호인이 없소." 연서경의 시선이 문 너머 겹겹이 포개진 궁궐 지붕을 스쳤다. 회색 기와들이 흐린 하늘을 떠다니는 듯 겹쳐졌다. "누군가는 대신 싸워줘야 하니, 입이 거칠어질 뿐이오." 말이 떨어지자, 짧고 단단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머리 위 공기가 얇아졌다. 숨이 조금 무겁게 내려갔다. 강진혁이 허공을 한 번 둘러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들었지. 여긴 네가 알던 해부실이 아니다." 그가 몸을 조금 기울여 그녀에게 가까이 속삭였다. "숨소리 하나도 기록되는 곳이다." 연서경은 눈을 정문 안쪽으로 돌렸다. "숨소리까지 적으려면, 종이값이 꽤 들겠군." 근위병 하나가 킥, 코웃음을 새어냈다. 거대한 황궁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밀렸다. 나무와 금속이 오래된 관절을 움직이는 소리, 삐걱. 어두운 속살이 조금씩 드러났다. *** 황궁 복도 안 공기는 눅진했다. 돌바닥에 스며 있던 습기가 밑창을 통해 올라왔다. 벽을 따라 늘어선 청동 촛대 위 초들이 타고 있었다. 불꽃 가장자리마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얇게 뒤섞였다. 탁한 기름 냄새가 낮게 깔려 있었다. "냄새에 익숙해져야 할 거다." 앞장서 걷던 강진혁이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긴 항상 뭔가가 타." "시신은 식지 않으면 금방 상하오." 연서경이 담담히 받았다. "이 냄새도 시간이지요. 얼마나 오래, 무엇이 타고 있는지 알려주는 기록." 발걸음 소리가 긴 복도를 끝까지 쓸고 지나갔다. 복도 끝에서 궁녀 둘이 급히 치마를 거둬 쥐고 벽에 몸을 붙였다.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공간 안에서 크게 불어났다. 눈을 정면으로 드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옆으로 비껴난 시선들 사이에서 낮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저 사람이 검시관이라잖아—" "대공비래. 피 묻혀서 시집갔다더라…" 말이 뒤에서 따라붙었다가, 그림자 속으로 삼켜졌다. 연서경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귀만 조금 더 열렸다. 서쪽 회랑으로 꺾이는 순간, 공기가 또 한 번 변했다. 달큰한 냄새가 코를 세차게 찔렀다. 복숭아꽃 향이었다. 연분홍 화병들이 복도 틈마다 놓여 있었다. 그 향 사이로 철 냄새가 아주 얇게 섞여 들어왔다. 혀 뒤쪽에서 다시 쇠맛이 올라왔다. "피 냄새입니다." 연서경은 보폭을 줄이지 않으면서 말했다. "냄새만으로 구분이 돼?" 강진혁이 옆눈으로 그녀를 흘겼다. "향수를 잘못 뿌리면 머리가 지끈거리듯." 그녀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피와 꽃이 섞이면 유난히 속이 뒤집히지요." 복도 끝, 큰 이중문 앞에 방패들이 벽처럼 세워져 있었다. 방패마다 황궁 문장이 촘촘하게 박혀 하나의 둔탁한 회색 면을 만들었다. 가까이 갈수록 공간이 좁아졌다. 깎여 들어가는 병목처럼. "대공 전하, 여기까지입니다." 근위대장이 이번엔 완전히 길을 막아 섰다. "안에서는 아직… 정리가—" "정리라." 강진혁의 손가락이 방패를 한 번 툭 두드렸다. 속이 비어 울리는 소리가 금속 안에서 번졌다. "누가 죽었지." "하급 관리 하나입니다." 근위대장이 말을 고르며 답했다. "황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래서 시체는 아무 데나 치워도 된다는 소리냐." 웃음도, 화도 아닌 마른 어조였다. 근위대장의 목이 붉어졌다. 입술이 두 번 떨렸다.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연서경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방패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짧게 훑어보고, 다시 근위대장을 봤다. "검시 안 하고 치워도 좋소. 대신 공식 기록에 그대로 쓰시오. '황궁은 신하가 왜 죽었는지 알 필요가 없다'고." 주변 공기가 움찔했다. 근위대장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옆에 있던 병사들 사이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아무도 그런—" "기록은 검시관 몫입니다." 연서경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평평했다. "죽은 자의 사인이 필요 없다면, 황궁 검시관 직책부터 없애시지요." 방패 뒤에서 누가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곧, 안쪽에서 다른 음색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시끄럽군." 방패 사이로 은회색 소매가 비집고 나왔다. 황실 조사관 특유의 기름기 도는 음성과 함께, 살집 있는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두덩이 무거웠고, 입술이 번들거렸다. "형조에서 나온 조사관이오." 그가 허리를 아주 약간만 굽혔다. "황실 사건은 원래 형조 소관입니다. 검시도 당연히 우리 쪽에서—" "형조판서 윤성호의 사람인가." 강진혁이 건조하게 물었다. 흥미라고 할 만한 온도도 없었다. 조사관의 눈에 짧게 빛이 올라갔다. "예, 윤 대감께서 직접—" "그럼 더더욱 비켜야겠군." 말이 다시 잘렸다. 강진혁이 방패 위 손을 내려 허리의 검자루에 걸었다. "윤성호는 돈 안 되는 일에는 손도 안 대지. 이런 급의 시체에 사람까지 붙였으면…" 그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 죽음을 꽤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지." 조사관의 표정이 굳게 묶였다. "전하, 말씀을 삼가시지요. 황궁 안입니다." "황궁 밖이면 내 목이 떨어질까 봐?" 강진혁이 어깨를 한번 올렸다 내렸다. "걱정 마라. 내 목은 이미 다른 데에 저당 잡혀 있으니까." 그 말이 한동안 허공에서 떠돌았다. 조사관의 시선이 연서경 쪽으로 옮겨갔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천천히 길을 그었다. "검시관이라지." 그가 콧등을 찡그렸다. "대공비가 피 묻히고 연회장 한가운데서 칼을 잡으면, 소문이 어떻게 돌겠소." "황족 시신이 아니라 하셨지요." 연서경이 곧장 받아쳤다. "하급 관리라고." 조사관의 입술이 짧게 떨렸다. 근위병들 사이에서 숨죽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장난할 처지가 아닐 텐데." 조사관이 가까이 다가왔다. 숨에서 매캐한 술 냄새가 났다. "흉흉한 소문 돌아봐야 좋을 게 있겠소? '대공비가 피를 뒤집어쓰고 연회장을 해부실로 만들었다' 이따위—" "칼은 조사관께서 더 익숙하시겠지요." 연서경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저보다 오래 쥐어 보셨을 테니." 공기가 한 번 더 갈라졌다. 근위대장이 양손을 비비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러다간 연회장이 도살장 소문까지 돌겠소!" "피가 바닥까지 흘렀는데,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오." 연서경은 방패 사이 좁은 틈으로 안쪽을 훑었다. 붉게 젖은 바닥이 지나치게 깨끗하게, 일정한 방향으로 닦여 있었다. "피는 덮으면 냄새가 더 오래갑니다. 식기 전에 보는 게, 황궁 체면에도 덜 해로울 겁니다." "그만." 이번엔 강진혁의 목소리가 낮았지만, 단단했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방패 하나를 옆으로 밀어냈다. 금속이 바닥과 긁히며 귀를 스치는 소리를 냈다. "비켜라. 이 여자의 칼끝이, 너희 혓바닥들보단 정확하니까." 밀려난 병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사관은 뭔가 더 내뱉으려다, 뒤편에서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 걸 느끼고는 입술을 닫았다. 눈알만 바쁘게 움직였다. "… 좋소." 그가 숨을 길게 내쉬며 한 발 물러섰다. "대공 전하의 책임 하에, 검시를 허락하겠습니다. 기록에 분명히 남기지요. 사인의 결론과 법적 책임은 대공비… 아니, 검시관에게 있다고." 연서경이 눈을 천천히 한 번 감았다 뜨며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책임은 늘 검시관 몫이오." "죽은 자가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때, 대신 서명하는 자니까." 문이 안쪽으로 활짝 열렸다. *** 연회장 안 공기는 이미 썩기 시작했다. 천장과 기둥을 따라 복숭아꽃 장식이 빽빽하게 엮여 있었다. 연분홍 꽃잎들이 바닥 위에 눈처럼 흩어져 있었고, 그 중 상당수는 밟혀 짓이겨져 있었다. 꽃잎과 피가 뒤섞여, 진흙 같은 덩어리로 뭉개졌다. 흰 대리석 틈새로 진홍빛이 스며들었다. 복숭아향이 과하게 달착지근했다. 그 아래, 훨씬 얇지만 더 집요한 철 냄새가 깔려 있었다. 목 뒤가 저리게 쿡 박혔다. 연서경은 코로 들이마신 숨을 입으로 조용히 내보냈다. 향과 피 냄새를 따로 골라내듯. "향이 지나치군요." "황궁 취향이지." 강진혁이 손가락 등으로 코를 한번 문질렀다. "뭐가 썩어도 꽃향기만 세게 뿌리면 가려진다고 믿는." 연회장 중앙에 둥근 테이블이 하나 밀려나 있었다. 본래 음식이 올라갈 자리였을 것이다. 지금은 흰 보가 덮여 있었고, 그 위에 시신 하나가 곧게 누워 있었다. 천 아래로 발끝이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발가락 사이에 짓이겨진 꽃잎이 끼어 있었다. 무대 위 악사들은 아직 악기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듯했다. 현악기에서 몇 줄이 흐느끼다 끊기는 소리가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귀족들은 벽 쪽으로 밀려나, 비단과 보석 사이에서 창백한 얼굴만 떠다니는 듯했다. "아…" 어디선가 신음 같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연분홍 드레스의 젊은 귀족 여인이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짙은 향수 냄새가 피 냄새를 덮으려 애썼다. "저 사람이 그 검시관이래." 여인이 옆의 젊은 남자에게 낮게 속삭였다. "죽음이랑 결혼했다는 그… 해부실의 신부." 젊은 남자가 키득거렸다. "눈빛 봐. 산 사람은 안 보고, 저기 덮인 것만 보는 눈이네." 연서경의 부츠 밑에서 꽃잎 하나가 으깨졌다. 물기 섞인 파열음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밟아 넘기며 중앙 테이블 앞까지 다가갔다. 황실 조사관이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일부러 한 계단 높은 자리 위에 서 있었다. 눈을 내려다뜨는 각도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자, 검시관." 그가 턱을 들었다. "황궁 한복판에서 칼을 드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시신을 못 보는 검시관은 눈먼 거나 마찬가지요." 연서경이 천 끝을 집어 들었다. "누가 눈을 감았는지는, 곧 알게 될 겁니다." 천이 젖혀지는 순간, 피 냄새가 한 번 더 진하게 치고 올라왔다. 시신의 얼굴은 종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은 반쯤 뜨여 있었는데, 동공이 공포에 얼어붙은 채 굳어 있었다. 입 주변에 검붉게 말라붙은 피가 넓게 번져 있었다. 목덜미를 따라 피가 흘러 내려, 흰 예복 깃을 얼룩지게 물들였다. "숨이 막혀 죽었군." 조사관이 작게 중얼거렸다. "계절 마력이 요즘 불안정하니, 마력 폭주겠지." "폭주한 마력은 흔적을 남깁니다." 연서경이 낮고 또렷하게 말했다. "눈 감은 결론은 나중에 하시오." 그녀는 예복의 자주색 비단 소매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안쪽에서 얇은 검시용 장갑이 드러났다. 이미 준비해 온 것. 손가락이 장갑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옆에 서 있던 하급 궁인이 낡은 가죽 상자를 바싹 끌어당겨 열었다. 메스, 핀셋, 작은 거울이 정돈되어 있었다. "여기서… 당장 하시겠습니까?" 궁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시신을 옮기면, 그게 또 소문거리가 될 거요." 연서경이 장갑 끝을 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이 제일 조용합니다. 모두 숨 참고 보고 있으니까." 귀족들 사이에서 누군가 웃음 비슷한 소리를 내다가, 곧 주변 눈초리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무대 위 악사들의 손이 완전히 멈췄다. 줄의 떨림만 아주 미세하게 공기 끝에서 흔들렸다. "대공 전하." 조사관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허락하시겠습니까? 이 장면, 오래 기억될 겁니다." "그래야지." 강진혁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기억이 남아야 기록도 남으니까." 그의 망토에서 짙은 침엽수 향이 났다. 북방 숲의 냄새. 피와 꽃 사이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섞였다. 연서경은 그 냄새를 한 번 들이켰다가 내쉬며 머리를 맑게 정리했다. "시작하겠소." 메스가 손에 들어왔다. 촛불이 얇은 금속면에 비치며 날카로운 선을 그렸다. 촛농 한 방울이 떨어져 손등 가까이에 뜨거운 점을 찍고 굳어갔다. 목에서부터였다. 흰 피부 위에 첫 선을 긋자, 메스와 살이 스치는 낮은 마찰음이 났다. 아주 얇고 차가운 소리. 피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멈춘 지 꽤 오래 지난 몸이었다. "호흡 곤란, 이후 급성 질식." 연서경이 낮게 중얼거리며 절개를 넓혔다. 기도 쪽으로 길을 만드는 손이 매끄러웠다. "목 안쪽, 기도에 이물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오." "마력이 기도를 태웠겠지." 조사관이 코끝을 씰룩이며 말했다. "계절 흔적만 찾으면 끝날 일일 텐데." "마력은 손으로 집히지 않소." 메스 움직임이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집히는 것부터 찾아보지." 기도를 드러내기 위해 주변 조직을 조금 더 갈라냈다. 피부는 차가웠다. 오래 꺼내놓은 고기처럼, 촛불 열기와 반대로 싸늘했다. 연서경의 호흡이 반 박자 더 깊어졌다. 전장에 들어서는 검투사처럼 몸의 긴장이 한 곳으로 모였다. "입 안쪽을 봐야 할 거요." 조사관이 말했다. "피가 꽤 묻어 있지 않소?" "그래서 보는 겁니다." 연서경이 시신의 턱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입을 더 벌리기 위해 작은 금속 지지대를 끼웠다. 치아 사이로 말라붙은 피와 거품이 굳어 있었다. 혀 위에는 검붉은 얼룩이 넓게 퍼져 있었다. "혀 듭니다." 그녀가 짧게 알렸다. 기록하듯 차분하게. 핀셋으로 혀 끝을 잡고,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아주 옅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피도, 꽃도 아닌 냄새. 오래 달궈졌다 식은 금속 냄새와 비슷했다. 연서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깐." 혀 밑, 점막과 점막 사이. 작은 검은 얼룩 같은 것이 살짝 박혀 있었다. 희미했지만, 분명히 이물이었다. "마력 흔적이오?" 조사관이 뒤에서 목을 내밀었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연서경이 손을 올려 그의 접근을 막았다. "숨소리 하나에도 흔적이 지워질 수 있소." 조사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족들 사이에서 몇몇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음을 삼켰다. 연서경은 더 가는 핀셋으로 바꿨다. 금속이 손가락 사이에서 차갑게 미끄러졌다. 혀 밑 점막을 살짝 벌리며, 그 사이를 섬세하게 훑어 나갔다. 탁. 핀셋 끝이 뭔가 단단한 것에 닿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있군." 숨이 짧게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촛불 쪽으로 시야를 틀어 혀 밑을 비스듬히 비추게 했다. 피에 절반쯤 덮인 금속 조각이 드러났다. 조각은 작았지만, 모서리가 살아 있었다. 핀셋으로 그 조각을 집어 올리자, 날카로움이 쇠를 타고 손끝까지 전해졌다. "마력이, 제법 단단하네요." 연서경이 조용히 말했다. "무슨 말이오?" 조사관이 급하게 되물었다. 아까의 여유는 사라져 있었다. 연서경은 대꾸하지 않고, 수반 위 흰 천에 금속 조각을 올려놓았다. 피가 천으로 스며들어 둥근 얼룩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에서 작은 금속이 은빛으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형태 보시오." 그녀가 모서리를 가리켰다. "날이 있습니다. 기도 안쪽에서 이런 걸 찾았다면, 이름이 뭐겠소?" 조사관이 가까이 다가와 눈을 찌푸렸다. "…암기." "그렇소." 연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 점막을 찢고 들어갔다 나간 흔적이 기도 안쪽에 남아 있습니다. 태워진 게 아니라, 찔린 상처." 귀족들 사이에서 작은 파문이 돌았다. "암기?" "황궁 안에서?" 속삭임들이 연회장 천장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조사관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허면… 그 다음에 마력으로 만든 암기일 수도 있지 않나? 계절 마력을 응축한—" "마력 응축체는 이렇게 남지 않소." 연서경이 말을 잘랐다. "보여드리지요." 수반의 물을 조금 떠 금속 조각 위에 떨어뜨렸다. 마력이라면 반응이 일어나야 할 터였다. 그러나 금속은 그저 물방울을 흘려보내며 빛만 맑게 반사했다. "열도 가보지요." 그녀가 촛불 위로 핀셋을 가져갔다. 금속 조각이 희미하게 달아올랐다. 물방울이 지직거리며 증발했다. 그 어떤 마력 특유의 광채도, 흔들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력 흔적이 아닙니다." 연서경이 짧게 정리했다. "사람 손으로 만든, 그냥 쇳조각이오." 조사관의 목젖이 크게 한 번 움직였다. "황궁 안에서… 그럼 이건 암기 살해… 누가—" "그 질문은 형조 몫이겠지요." 연서경이 덧붙였다. "제 일은, 이 자가 어떤 길을 지나 죽음까지 갔는지, 그 길의 모양을 그리는 것뿐이오." 군화 소리가 다시 또각, 또각 울렸다. 강진혁이 금속 조각 쪽으로 걸어왔다. 허리를 굽히며 숨을 길게 들이켰다. 한쪽 폐가 살짝 버거워하는 듯, 호흡이 미묘하게 끊겼다. 눈빛은 여전히 선명했다. "작군." 그가 핀셋을 받아 조각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마디가 아주 약하게 떨렸다. 조각을 돌려 보며 이마 사이 주름이 깊게 팬 채 한 점에 고정되었다. "전하?" 조사관이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전에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다." 답은 너무 빨리 튀어나왔다. "이 정도 쇳조각은 어디에나 있지." 말과 달리, 그의 손등에는 소름이 가볍게 돋아 있었다. 연서경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조각 하나가 그의 과거 어디쯤에 박혀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시신의 목으로 돌렸다. 기도 안쪽의 상처선을 더 자세히 살폈다. 일정한 각도로 찢긴 점막, 한 방향으로 밀려난 핏덩이. "상처 각도가 일정하오. 바깥에서 던져진 게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말이 여기서 끊겼다. 귀 끝을 스치는 얇은 소리가 들렸다. 윙—, 하고 마력이 미세하게 스쳐 지나가는 감각. 연서경의 등줄기가 미세하게 굳었다. "누가 간섭했군요." 입술만 아주 조금 움직였다. 기도 주변 공기가 일렁였다. 시신의 목 언저리에서, 희미한 푸른 기운이 한 번 피어올랐다 꺼졌다. 마치 누가 서둘러 덮은 흔적처럼. "마력 봉인 흔적입니다." 연서경이 조사관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이 정도면, 마력을 지우기엔 이미 늦었소." 조사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 내가 그런 건—" "조사관께서 했다고는 안 했소." 연서경의 시선이 그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마력 제어용 팔찌가 미세하게 빛을 떨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사용된 흔적. "다만 누군가 시신의 마력 흐름을 뒤섞어 놨지요. 마력을 지우려는 자는, 대개 물리적 증거는 잊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참지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마력 사고요, 암기 살해요?" 근위대장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조용히! 검시는 아직—" "둘 다입니다." 연서경이 끊었다. "마력을 이용해 암기를 숨겼습니다. 질식은 결과일 뿐, 방법이 아니오." 연회장의 공기가 한 번 뒤집혔다. 연회장은 더 이상 연회장이 아니었다. 발밑의 짓이겨진 꽃잎과 피웅덩이, 그리고 테이블 위 갈라진 목이 이곳을 명백한 살인 현장으로 바꿔 놓았다. 조사관이 뒷걸음질을 치듯 물러났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기도 안쪽 찢김의 각도." 연서경이 피 묻은 기도 안쪽을 가리켰다. "입으로 억지로 집어넣은 게 아니라, 안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간 흔적입니다. 단순한 흡인도, 기침으로 튀어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아주 가늘고 먼 속삭임이 들렸다. —꺼내 줘… —목이… 죽은 자의 목소리. 오랫동안 그녀의 귀를 괴롭혀온 환청이 다시 기어 올라왔다. 연서경의 손이 공기 가운데에서 아주 잠깐 멈칫했다. 곧, 다시 정확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력을 써서 기도 안쪽에 암기를 만들어 넣고, 연회 시간에 맞춰 터지도록 설계한 것 같소." 그녀가 말했다. "질식과 토혈은 그 설계된 결과입니다." 귀족 중 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람을… 시계처럼 맞춰 죽인 거군…" "연회 시작 시간에 죽게 만든 거지." 강진혁의 목소리가 낮게 뒤따랐다. "게다가 봄 연회." 연서경이 그를 한 번 흘깃 봤다. "핏빛 봄의 잔치. 이름에 충실했군요." "웃기엔, 피 값이 너무 싸다."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하급 관리 하나로 끝날 일인 것 같지도 않고." 황실 조사관이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 검시관, 말이 너무 앞서나가오. 아직 마력 측정도 제대로—" "마력 측정은 형조에서 맡으시오." 연서경이 담담하게 잘랐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 말합니다." 그녀는 시신의 손가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손톱 밑에 복숭아꽃 꽃가루가 노랗게 끼어 있었다. 바닥의 꽃을 움켜쥔 채 버둥거린 흔적. 손가락 마디 사이에 피가 마르며 잔주름을 따라 굳어 있었다.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손을 뻗은 모양입니다." 연서경이 조용히 말했다. "잡아준 손은, 한 손도 없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숨소리가 몇 번 크게 들렸다. 몇몇은 얼굴을 돌렸고, 몇몇은 입술을 악물었다. "이제 되겠소?" 근위대장이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검시는…" "조금만 더." 연서경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혀 밑에서 암기를 찾았으니, 그 근원도 찾아야 합니다." "더 어디를—" "입 안 깊숙이. 혀 밑과 인두, 비인두의 경계. 마력이 스며 나오는 길입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신의 입 안에서 검은 기운이 아주 희미하게 일렁였다. 조금만 눈이 둔해도 놓칠 정도의 농도. 혀 밑 깊은 곳에서 실오라기 같은 검은 연기가 몇 줄기 나오다 공기 중에서 사라졌다. "보이십니까." 연서경이 물었다. 황실 조사관이 비명을 삼키듯 숨을 끊었다. "저, 저건… 금기 마력입니다. 황궁 안에선 절대—" "그래서 금기겠지요." 연서경이 혀를 더 크게 들어 올렸다. 핀셋 두 개를 동시에 써서 혀 밑 점막을 최대한 벌렸다. 어둠 깊은 인두 안쪽에, 아주 작은 반짝임이 보였다. "또 있군요." 숨이 더 가늘어졌다. "이번 건 더 작습니다. 혀 밑 점막 안쪽, 깊은 데 박혀 있소." 핀셋 끝이 그 반짝임을 건드렸다. 차갑고 미세한 전율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이번 조각은 직선뿐 아니라 곡선도 있었다. 인장 반지에 새겨질 법한 윤곽. "조명이 부족합니다." "기다려." 강진혁이 촛대를 들고 다가왔다. 촛불이 그의 얼굴 옆선을 비스듬히 훑었다. 광대뼈와 턱선이 더 도드라졌다. 그가 촛불을 조금 더 시신 쪽으로 기울였다. 손가락에 열기가 훅 달려들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이 정도면 되냐?" "충분하오." 연서경이 시야를 좁히며 핀셋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혀 밑 점막을 찢지 않도록 힘을 최대한 나눠 쥐었다. 작은 조각을 끄집어내자, 손끝이 더욱 강하게 저릿했다. 검은 기운이 조각 주변에서 잠깐 피어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핀셋 끝에서 조그마한 금속 조각이 공기 중에 반짝였다. 황궁의 인장이 작게 새겨진 반원형 쇳조각. 그 위로 희미한 금기 문양이 겹쳐 있었다. 연회장 곳곳에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황실… 인장?" 황실 조사관이 목이 메인 소리로 말했다. "이게… 왜 입 안에—" "혀 밑에 숨겨져 있었지요." 연서경이 천천히 말했다. "누가 억지로 넣었는지, 아니면 본인이 넣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검시관!" 근위대장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말씀을 조심하시지요. 황실 인장이 입 안에 있었다느니 하는 말이 돌아다니면—" "그건 소문이 아니라 기록이오." 연서경이 잘라 말했다. "하급 관리 혀 밑에서 황실 문양이 새겨진 금속 조각이 나왔고, 그 자는 봄 연회 중 질식사했다. 이 사실은 그대로 남겨야 합니다." 그녀는 조각을 핀셋째로 들어 올렸다. 연회장 안 모든 시선이 그 작은 쇳조각에 빨려들었다. "누군가 지우려 해도, 이 장면까지는 못 지울 겁니다." 그제야 연서경이 손목을 비틀어 조각 방향을 살짝 바꿨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움직임. 조각은 자연스럽게 강진혁 쪽으로만 선명하게 보이는 각도가 되었다. "전하." 목소리가 거의 숨결에 묻힐 만큼 낮았다. "보시겠습니까." 그의 눈이 조각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동공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오래전에 잃어버린 조각이 갑자기 제자리로 떨어진 사람의 눈이었다. 손목 안쪽 혈관이 툭, 튀어올랐다. 숨이 한 번 들이켜지다 목에서 막혔다. "…이 문양 사이에." 그가 겨우 말을 짜냈다. "십 년 전, 북부 전장에서 사라진 인장이 있다." 연서경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강진혁의 입술이 굳어졌다. 목 근육이 툭 치받듯 올라왔다. 목 안쪽이 조여드는 듯했다. "내 형." 칼끝이 쇠를 긁는 것처럼, 거칠게 갈린 음성이 입 밖으로 나왔다. 연서경은 조각을 살짝 틀어 손바닥 안에 숨겼다. 밖에서 보면 그저 손을 내리는 평범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쇳조각 하나는 분명히 둘만 공유하는 증거가 되었다. "이 문양은 황실 금고에서만 쓰는 겁니다." 황실 조사관이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형조에서 관리하는 인장이 아니고… 좌의정도 아니고, 황제 전하의—" "그 입 다무시오." 근위대장이 이번엔 그를 막았다. "이 자리에서 그런 이름을 함부로 올리면—" 연회장 천장 위쪽에서, 시선 하나가 내려다보는 느낌이 스쳤다. 발코니 난간 뒤, 흐릿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이 등에 박혔다. 새가 고양이 기척을 느낄 때처럼, 등줄기가 싸늘했다. 강진혁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조각. 잠시 내게." 연서경이 눈을 잠시 좁혔다. 이 작은 증거가 어디에 있어야 가장 오래 살아남을지, 단 몇 초 동안 계산했다. "전하 몸에 숨겨 두는 게, 황궁 서고보다 덜 위험하겠지요." 그녀가 조각을 그의 손바닥 위에 놓았다. 쇳조각이 그의 손금 사이에 닿으며 짧게 소리를 냈다. 차가운 감촉이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그가 손을 힘껏 쥐었다.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손."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연서경이 눈을 깜빡였다. "…예?" "피." 그가 턱으로 그녀의 손을 가리켰다. 메스를 오래 쥐느라 굳어 있던 손등에는 이미 피가 얼룩져 있었다. "황궁 놈들 눈엔, 그 피 한 방울도 물어뜯을 핑계일 거다." 말과 동시에, 그는 허리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거친 천에 북부 문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세탁으로도 다 지워지지 않은 먼지와 피의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손수건이 연서경의 손등 위로 내려왔다. 문지르지 않고, 피 위에 천을 살짝 눌렀다 뗐다. 까슬까슬한 천이 피부를 스쳤다. 피 냄새와 함께 촛농 묻은 뜨거운 점도 함께 사라졌다. 연서경의 어깨가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살짝 굳었다. 황궁에서 누군가가 자기 손을 닦아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이런 자리에서는.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해." 강진혁이 말을 잘랐다. 시선은 손수건에만 꽂혀 있었다. "넌 지금 내 방패니까." 계산적인 말이었다. 감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계산이 인간의 체온을 닮아 있었다. "피는, 내 몫으로 옮겨 두는 게 낫겠지." 그는 손수건을 접어 허리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남은 피를 한 번 쥐었다 폈다. 피가 손금 사이에 스며들었다. "검시는 끝난 걸로." 근위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신을 치우고, 연회를—" "아직입니다." 연서경은 테이블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죽은 자의 이름과 사인, 마지막 증거까지 기록해야 합니다." "더 뭘—" "이 자의 혀 밑에서 나온 황실 인장 조각." 연서경의 시선이 조사관, 근위대장, 귀족들을 차례로 훑었다. "공식 기록에서 빠진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공범이 되겠지요." 근위대장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 황실 조사관이 마지막 기대를 걸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록은… 어떻게…" 강진혁이 천천히 연서경을 바라봤다. 눈동자 안쪽에서 복잡한 것들이 부딪히다 멈췄다. 분노, 두려움, 그리고 짧은 결심. "죽은 자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연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록하는 건, 제 몫이지요." 그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래." 그가 연설하듯,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봄 연회에서, 황궁 하급 관리 한 명이 죽었다." 목소리가 연회장 구석까지 또렷하게 닿았다. "사인은 질식. 기도 안쪽에서 황실 인장이 새겨진 금속 조각과 암기가 발견됐다." 귀족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사색이 되었다. 누군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군가는 입을 꽉 막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자르지 못했다. "검시는 황실 검시관 연서경이 맡았다." 강진혁이 말을 이어갔다. "그 결론에 따른 책임은, 북부 대공가와 내가 함께 진다." 근위대장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황실 조사관은 아가미처럼 입만 벌렸다 닫았다. "이제, 기록하시오." 강진혁이 연서경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식대로." 연서경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숭배도 복종도 아닌, 그저 인정에 가까운 움직임. "이 자는 계절 마력이 아니라, 인간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소." 그녀가 차분히 선언했다. "마력은 도구였을 뿐입니다. 칼이 아니라, 칼자루였지요." 공기 온도가 눈에 띄게 내려갔다. 황궁이라는 큰 판 위에 새 조각 하나가 박혔다. 그 조각에는 황실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십 년 전 북부 전장에서 사라진 한 형의 이름이 달라붙어 있었다. 발코니 위 그림자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안에서 또 다른 시선이 몸을 틀었다. 뱀이 방향을 바꿀 때처럼, 느리지만 분명하게. 연서경은 그 시선을 피부로 느꼈다. 이제 자신이 이 궁 안에서 본격적인 사냥감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에는 방금 맞춰 넣은 조각의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황궁 전체를 기울일 수도 있는, 작은 쇳조각 하나의 무게. 그 무게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누구의 목을 결국 짓눌러 버릴지. 다음 시체가 어느 자리, 어느 시각에 맞춰 쓰러질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장치는 이미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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