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12장. 곰팡이 냄새 나는 계단 끝, 얼음의 숨을 쫓는 자들
황실 기록 보관소 입구가 잠겨 있지 않았다.
그 허술함이 먼저 눈에 박였다.
돌계단 아래로, 눅눅한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곰팡이와 묵은 종이 냄새가 섞인 공기가 위로 밀려 올라왔다. 연서경은 한 손으로 문을 밀어젖히고, 다른 손으로는 강진혁 팔을 잡아당겼다. 그의 장검집이 계단 모서리를 긁으며 짧게 쇳소리를 튕겼다.
"발 치우세요. 미끄러져 죽기 싫으면."
숨은 이미 목까지 차올라 헐떡였지만, 목소리는 억지로 낮췄다. 계단 아래에서 올라오는 공기가 살갗을 훑고 지나갔다. 뒤쪽 복도, 군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가까워졌다. 군인들의 숨소리까지 벽을 타고 번졌다.
"… 먼저 안 보여."
강진혁이 짧게 내뱉었다. 입김이 희뿌옇게 번졌다가 바로 얼어붙듯 사라졌다. 그의 손이 연서경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지점에서 얼음기 같은 냉기가 스며 나왔다. 차가운 감각이 한 겹씩 살갗을 조여 들었다.
"안 보여도 내려가셔야죠, 대공마마."
밟고 내려가는 돌마다 미세하게 젖어 있었다. 피인지, 배관에서 스민 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계단 수와 발 간격, 뒤에서 쏟아져오는 발소리 속도를 동시에 계산했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폐가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
복도 끝에서 고함이 터졌다.
"저쪽이다! 서리 냄새 따라가!"
연서경은 입술을 다물고 거의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뒤에서 끌려오는 강진혁 몸무게가 팔과 어깨에 그대로 실렸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느낌이 뼈까지 전해졌다. 이 속도라면 둘이 한 번에 굴러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발 드세요. 하나, 둘—"
말이 끝나기 전에, 강진혁 몸이 휘청했다. 무릎이 풀리며 계단 모서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옆으로 쏠리자, 연서경은 본능적으로 잡아당겼다. 귓가 바로 옆에서 그의 숨이 거칠게 튀었다.
"… 젠장."
욕설이 낮게, 귓불 가까이를 스쳤다. 피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쇠맛이 도는 비릿한 향이 먼지와 섞여 목 안쪽을 긁었다.
계단이 끝났다.
아치형 석문이 짧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 무너진 서가와 쓰러진 책더미가 어렴풋한 그림자를 이루며 쌓여 있었다. 지하 보관소, 가장 깊은 층.
문턱을 넘어서는 동시에, 연서경은 몸을 틀어 강진혁을 서가 사이로 거의 밀어 넣다시피 했다.
"안쪽으로. 소리 죽이시죠."
쓰러지면서도 그는 습관처럼 칼자루를 더듬었다. 칼이 반쯤 칼집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긁으며 짧은 비명을 냈다. 쇳소리가 구석으로 튕겨 들어갔다.
위쪽 계단, 발소리가 더 빠르게 찍혔다. 숨 몰아쉬는 기척이 계단의 울림과 섞였다. 연서경은 지하 입구 옆, 오래된 장부가 꽂혀 있던 서가를 어깨로 힘껏 밀었다.
돌벽에 닿는 느낌이 아니었다. 텅 빈 속을 두드리는 것 같은 울림. 서가 전체가 아주 조금, 숨 쉬듯 뒤로 물러났다.
틈이 열렸다.
좁고, 숨 막히는 어둠. 오래 갇혀 있던 먼지와 축축한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피부를 핥고 지나가는 공기가 꽉 막힌 폐를 쓰다듬듯 스쳤다.
"들어가세요."
입말은 예의를 지켰지만, 손은 거칠었다.
강진혁 어깨를 붙잡아 그 틈으로 밀어 넣었다. 돌과 책등이 그의 등과 쇄골을 긁었다.
그가 낮게 신음했다.
"… 대신 씨, 연서경."
"죽은 자들 하소연 들어주는 건 제 일이지만, 오늘은 접수 안 합니다. 숨부터 붙이고 말씀하시죠."
서가 뒤 공간은 사람 하나 누우면 꽉 차는 정도였다. 벽에는 차가운 습기가 엉겨 있었다. 머리 위 어딘가에서 물이 아주 조금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온수 배관일 것이다.
서가가 천천히 제자리로 밀려 나왔다. 입구가 막히면서, 어둠이 한 톤 더 짙어졌다. 바로 바깥, 군인들의 발소리가 우르르 계단 아래로 쏟아져 내려왔다. 벽 하나 사이, 숨소리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여기까지 냉기 잔향이 내려왔는데… 분명 이쪽이야.”
“서가 뒤도 뒤져봐.”
서가가 바깥쪽에서 덜컹, 거칠게 잡아당겨졌다. 안쪽에서 무게를 버티는 금속 걸쇠가 끈질기게 버티는 느낌만 전달됐다. 연서경은 자기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입술을 꼭 다물었다.
강진혁의 숨이 가까이에서 들락거렸다. 들이마실 때마다 좁은 공간의 온도가 한순간 낮아졌다. 그의 숨에서 흘러나온 서리가 허공에 맺혔다가, 연서경 손등 솜털을 얇게 얼려 붙였다.
그녀는 그의 가슴께로 손을 뻗어 과감하게 눌렀다.
"숨 줄이세요."
경고에 가까운 속삭임이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마력이 요동쳤다. 규칙 없는 박동. 잡음처럼 튀다가, 갑자기 한 음정 위로 치솟았다. 점점 더 빠르고 세차게.
"… 이번에는 잘… 안 돼."
그의 이마가 그녀 관자놀이에 거의 닿았다. 숨이 뺨을 스쳤다. 피 향과 서리 냄새가 뒤섞여, 뜨겁고 차가운 공기가 한꺼번에 닿았다.
바깥에선 서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됐다. 책등이 미세하게 떨렸고, 먼지가 눈썹 위로 떨어졌다. 입안은 마른 헝겊처럼 바싹 말라붙었다.
연서경은 손끝으로 그의 늑골을 더듬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갈비뼈 사이.
그의 검시 기록을 수없이 넘기며 이미 머릿속에 그려 둔 통로였다. 어느 호흡에서 어느 혈관이 얼고, 어느 쪽으로 먼저 마력이 흐르는지 외워 둔 자리.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지점을 골라, 재빨리 눌렀다.
"아—!"
짧은 신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시에, 그의 몸 안에서 튀던 냉기 흐름이 한 박자 비틀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잠깐 느슨해지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발소리, 들리시죠."
서가 너머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군인들의 욕설과 보고가 계단 위로 올라가며 흐릿하게 퍼졌다.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엔진 소음처럼 멀어졌다.
그녀는 손에 힘을 아주 조금 풀었다.
강진혁의 호흡도 미세하게 리듬을 되찾았다. 완전히 정돈된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 전처럼 터지기 직전의 고장 같은 느낌은 줄어들었다.
어둠에 눈이 익어 가자, 서로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났다. 코선, 턱선, 젖은 머리카락. 팔을 뻗으면 쉽게 목을 움켜쥘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 괜찮으십니까."
생각보다 더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괜찮아 보이냐."
쉰 목소리가 살짝 비틀렸다. 비웃으려다 만 입꼬리만 떨렸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면서도, 눈가에는 여전히 버티려는 기색이 걸려 있었다.
서가 바깥이 완전히 조용해질 때까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 위 온수 배관에서 새어나오는 증기가 차가운 공기와 섞였다. 따뜻한 습기가 얇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
서가 뒤 통로는 예상보다 길었다. 옆으로 살짝 비켜 한 발씩 옮길 때마다 어깨가 돌벽을 스쳤다. 젖은 벽이 옷자락을 긁고 지나가며 찬 습기를 남겼다.
"앞 조심하세요. 바닥 울퉁불퉁합니다."
연서경은 왼손으로 벽을 짚고, 오른손으로 강진혁 허리춤을 붙잡았다. 입가에 떠오르던 농담 하나를 삼켰다. 지금은 리듬을 줄이고 숨부터 숨겼다.
한참 그렇게 발을 옮기다, 통로 끝이 갑자기 넓어졌다. 가슴을 조이던 압박이 아주 조금 풀렸다. 머리 위로 허연 김이 내려앉는 작은 공간. 벽을 타고 노출된 온수 배관이 여러 줄 지나갔다. 지하의 맥박 같은 자리.
"여기가…"
무심코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황실 지하 온수 조절실. 기록 보관소 아래에 이런 걸 숨겨 놓은 셈이다. 관리와 비밀을 한곳에 겹쳐 쌓아 둔 구조.
배관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김이 공간을 부옇게 채웠다. 얼어붙었던 손가락 마디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피 냄새 속에 쇠와 석회 냄새가 얇게 깔려 있었다. 오랜 물의 내음.
강진혁은 그 자리에 거의 주저앉듯 벽에 등을 기대었다.
등 뒤로 배관의 열기가 전해졌다. 차가운 피부 위로 뜨거운 김이 부딪히며 얇은 수증기가 일어났다.
그의 흰 셔츠는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까지 검붉게 젖었다. 피가 굳기 시작한 자리마다 작은 얼음 조각이 들러붙어 있었다. 굳은 혈흔이 천에서 떨어져 바닥 돌에 맞으며 맑게 깨어졌다.
연서경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옷 벗으셔야겠습니다."
"… 지금? 여기서?"
눈초리가 조금 올라갔다. 입은 장난을 걸었지만 턱 근육은 굳어 있었다. 통증을 이로 물어 끊듯 참는 표정.
"탈의실 찾을 시간 없습니다. 피는 생각보다 빨리 식고, 마력은 생각보다 빨리 퍼집니다."
손을 뻗어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 온도는 들쭉날쭉했다. 쇄골 아래는 미지근했다. 오른쪽 어깨, 칼이 스친 근처는 비현실적으로 차가웠다. 유리 표면을 더듬는 것 같은 감촉.
"… 손, 떨리는데."
강진혁이 낮게 지적했다. 시선이 그녀 손등에 박혔다.
"춥습니다."
짧게 답했다. 실제로는 아니었다. 손끝 떨림은 온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서리 마력이 피부 밑으로 기어 들어오는 감각 때문에 오는 경련에 가까웠다.
셔츠가 완전히 벗겨졌다. 어깨가 드러났다.
상처는 칼자국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관절을 중심으로 검은 문양이 동심원처럼 퍼져 있었다. 누군가 설계한 회로도처럼 정교했다. 문양 한가운데, 칼이 들어간 구멍을 중심으로 살이 서릿빛으로 변색돼 있었다.
금속이 식을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한 찬 향이 한 번 더 코를 찔렀다.
연서경은 해부가위에 손을 댔다가 멈췄다.
지금 필요한 건 가위가 아니라 메스였다. 허리 주머니에서 얇은 금속을 꺼냈다. 손에 올리자 냉기가 곧바로 뼈까지 스며들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진혁은 일부러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이 꼴로 춤이라도 추겠냐."
그러면서도 호흡은 깊어지지 못했다.
숨 들이쉴 때마다 늑골 사이가 단단히 조여 들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문양 중심에서, 째깍거리는 시계처럼 규칙적인 진동이 손에 전해졌다.
연서경은 메스를 들어, 문양의 바깥 테두리를 따라 피부를 아주 얕게 그었다.
순간, 공기가 뒤집혔다.
서리가 폭발하듯 튀었다.
메스가 닿은 지점에서 하얀 성애가 번쩍이며 튀어나왔다. 차가운 기운이 손을 타고 역류했다.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한순간 얼음물이 쏟아진 것처럼 감각이 날아갔다. 메스를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을 더 깊게 죄었다. 관절마다 뻣뻣한 통증이 박혔다.
"… !"
입술 안쪽을 깨물어 소리를 삼켰다. 피 맛이 혀끝으로 번졌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때까지 메스를 움켜쥐었다.
강진혁 어깨 근육이 갑자기 튀었다.
반사적으로 팔이 뻗으며 그녀를 밀어냈다. 손바닥이 가슴뼈 한가운데를 세게 쳤다. 숨이 반 칸 잘려 나갔다.
"건드리지 말랬—"
끝까지 나오기 전에, 연서경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얼어붙어 가는 쪽과 반대편 손으로.
"죽고 싶으면 계속 밀어내시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숨이 거칠게 얽혔다.
"살고 싶으면 내 손이나 잡으세요."
그 말 뒤로 짧은 정적이 미끄러졌다. 온수 증기가 둘 사이에서 조용히 돌았다.
강진혁이 바로 앞에서 그녀를 바라봤다. 푸른빛이 눈동자 안에서 조금씩 일그러졌다. 눈꼬리 위에 맺힌 땀방울이 떨어지지 못하고 매달렸다.
"… 이게 다."
그가 짧게 숨을 뱉었다.
"명령이냐, 검시관."
"의학적 권고입니다."
단호했다. 그 한 줄이 이 작은 공간에 무게처럼 내려앉았다.
그의 손목에서 힘이 빠졌다.
대신 그는 그녀가 쥐고 있던 손을 거꾸로 감싸 쥐었다. 얼음 같은 피부와 반대되는, 얕지만 확실한 열이 겹쳤다.
"잡았다. 됐지."
연서경은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감각이 살아 있는 왼손으로 메스를 옮겨 쥐고, 문양 가장자리의 경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라인, 기억나십니까."
"… 매번 네 보고서에 등장하는 그 라인."
"예. 오른쪽 서리 통로. 흉막 바로 아래. 마력 흡수 불균형, 제가 늘 지적하던 곳."
강진혁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게 지적하더니, 오늘은 직접 눌러 주네."
"오늘만은 실험 대상이 아니라 환자이십니다."
짧았지만, 그 안에 선이 하나 그어졌다.
손끝에는 집중이 모였다. 경혈 따라 압을 나눠 주면서, 메스로 그 틈 사이 얼어붙은 조직을 조금씩 도려냈다.
피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얼어붙은 혈관 조직이 잘게 부서져 나왔다. 메스날에 닿는 감촉은 살이 아니라 얇은 유리를 긁는 느낌에 가까웠다. 피부 안쪽에서부터 서늘한 떨림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바로 귀 옆에서 그의 이를 갈아 무는 소리가 났다.
목 깊은 데서 새어나오는 신음이 길게 끌렸다.
"… 아주… 조심스럽게 참으셔야 합니다."
"참고 있어."
거칠게 잘린 대답.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등은 굽었고, 갈비뼈는 위로 들려 있었다. 근육들이 하나같이 비명을 삼키는 모양새였다.
연서경은 메스를 잠시 떼어 손을 바꿔 잡았다. 오른손은 이미 손끝까지 푸르게 변해 있었다. 살 위로 얇은 서리막이 올라와 있었다.
"손."
강진혁이 낮게 말했다.
"네 손, 얼고 있다."
"원래 조금 차갑습니다."
눈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 혈관 위로 얼음이 느리게 기어올랐다. 이대로 계속 쥐고 있으면 자신부터 무너질 게 분명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선택지를 훑었다.
"이쪽을 써야겠군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을 가로지르는 옛 화상 자국이 시야에 걸렸다. 마력 폭주가 처음 일어났던 밤에 남은 자국. 그 부분만은 아직도 평범한 체온보다 뜨거웠다.
"뭐 하는—"
그가 말을 다 끝내기 전에, 그녀가 움직였다.
왼손등을 그의 어깨, 검게 번진 문양 중심에 그대로 갖다 댔다.
피부와 피부가 마주 닿는 순간, 번쩍.
마치 정전기 같은 감각이 튀었다. 얇은 바늘 수십 개가 한꺼번에 살을 찌르며 들어오는 듯했다. 그 아래로, 타오르는 덩어리가 얼음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이질적인 열이 따라왔다.
시야 주변이 잠깐 어두워졌다.
"… 흠."
숨이 한 번 끊기며 목 안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머릿속을 누군가의 비명이 스쳐 지나갔다. '꺼내줘.' '춥다.' '여기—' 겹겹이 쌓인 목소리들이 귓가를 스쳤다가 흩어졌다.
연서경은 그 소리를 밀어냈다. 마력 흐름이 손등을 타고 팔 안으로 거꾸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흐름에 맞춰 손목, 팔꿈치, 어깨에 차례로 힘을 배분했다. 물길을 맨손으로 바꾸는 기분.
"… 멈춰."
강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으르렁과 부탁 사이의 어조. 그 말이 자신에게 한 건지, 몸 안의 빗나간 마력에게 한 건지 애매했다.
문양 속 서리빛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그러다 조금씩, 일정한 파도를 만들며 차분해졌다. 검은 문양 사이에 끼어 있던 푸른빛이 희미하게 빠져나가고, 대신 탁한 잿빛이 번졌다.
"거기. 지금 누르는 자리."
강진혁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눈은 감지 않고 정면을 바라봤다. 그녀 얼굴을.
"그 자리가, 처음 낙인 찍히던 자리야."
손등이 잠시 멈칫했다. 압력이 약간 누그러졌다.
"장난으로 새긴 상처는 아니셨겠죠."
"장난이면 좋았겠지."
짧은 웃음이 터졌다. 웃음 끝에 숨이 겹겹이 갈라졌다.
"이건 상처가 아니야."
목소리가 낮게 파고들었다.
"황제가 내 영혼에 찍은 도살권이지."
단어가 조절실의 김 사이를 천천히 흩어졌다.
한동안, 배관에서 새는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살권.
그 말이 손등을 통해 문양 밑으로 젖어드는 것 같았다. 연서경은 늘 보고서에 적어오던 문장들을 떠올렸다. '실험 대상, 북부 출신.' '계절 마력 반응 특이.' 그 서류 문장들과 지금의 단어가 겹쳤다.
그녀는 손등을 조금 더 깊이 눌렀다.
서리 마력이 손등을 타고 다시 그의 몸 안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온도가 서로를 스쳤다. 한쪽은 뜨겁고, 한쪽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겨우 균형이 맞춰지는 느낌.
"고통은."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조금 줄어드십니까."
"네가 누르고 있는 자리 말고는."
그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 자리만, 아주 기막히게 아프다."
"그럼 제대로 짚은 겁니다."
눈가가 피식 구겨졌다. 통증과 농담이 헷갈리는 표정. 손목에서 줄처럼 박힌 힘줄이 팽팽하게 드러났다.
"… 왜."
잠시 후, 그가 물었다.
"왜 도와. 네가 뭐 얻으려고?"
발언보다 투척에 가까운 말투였다. 빈정으로 포장한 취약함.
연서경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손등 압을 조금 더 조절하며 마력 파형을 지켜봤다. 파형이 점점 일정한 리듬을 잡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대공마마."
호칭부터 고쳐 잡았다.
"버려진 분이 아닙니다."
그의 눈썹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움직였다.
"쓰레기통이라며."
"쓰레기통도 용도가 있습니다."
단호한 톤. 그 말에 잠시 그는 말을 잃었다.
"누군가는 버려진 걸 담아야죠. 증거, 기록, 지워진 사람들의 조각."
입술이 살짝 말라붙어, 혀끝으로 적셨다.
"당신 안에는 황궁이 버린 사람들의 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을 모아놓은 통. 저는 그런 통을 하나라도 더 오래 보존하고 싶습니다."
"검시관스럽네."
피곤한 웃음이 섞인 소리가 났다.
"사람이 아니라 시체를 먼저 생각해."
"死人이든 生人이든, 기록 가치는 같습니다."
짧았지만 확고했다.
"도살권이든 저주든 상관없어요. 제 메스 끝에 걸린 이상, 당신은 환자입니다."
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 문장에 섞인 감정을 자각했다. 업무 선을 살짝 벗어난 말. 감정을 배제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새겨 둔 규칙 위를 조용히 긁어낸 말.
강진혁 눈빛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 지금, 감정 섞였다고 인정한 거냐."
"아닙니다."
"거짓말."
단칼이었다. 그런데 그 눈에서는 묘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
"손, 지금은?"
"마력, 가라앉고 있습니다. 당신 안쪽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납니다."
검은 문양의 색이 한 톤 옅어졌다. 대신 깊은 층에서 아직 서리 기운이 꿈틀거렸다. 낙인이 완전히 지워지진 않았다. 폭주만 막아 둔 정도.
연서경은 손등을 천천히 떼었다. 손등의 화상 자국이 다시 싸늘해졌다. 피부 위에 남은 그의 체온은 금방 식어갔다.
강진혁이 어깨를 살짝 움직였다.
근육이 떨리긴 했지만, 아까처럼 제멋대로 경련하진 않았다.
"… 근처는 살아 있네."
그가 중얼거렸다.
"아주 잠깐은."
연서경은 메스날에 붙은 얼어붙은 조각을 천으로 닦았다. 평소였다면 바로 병에 넣어 라벨을 붙였겠지만, 지금은 그런 절차를 생략했다.
"이 낙인."
그녀가 문양을 한 번 더 훑었다.
"황실 표식과 닮았습니다. 제 부친 보고서에도 비슷한 도식이 있었습니다."
"네 아버지."
처음으로, 그가 그 존재를 입에 올렸다.
"황제가 내게 이걸 찍을 때, 그 자리에도 있었을까."
"… 모릅니다."
답은 짧았다. 대신 심장이 한 번 어긋나게 뛰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잠깐 공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
***
둘은 온수 배관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골랐다. 밖의 발소리는 완전히 멀어졌다. 황궁 어딘가에 여전히 사람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이곳 위치는 모를 터였다.
옷은 축축했다. 피와 물, 땀과 증기가 뒤엉킨 상태. 배관에서 새는 김이 셔츠를 천천히 말렸다. 천 사이로 기어 들어온 따스함이 긴장을 조금씩 풀었다.
강진혁이 뒤편 배관에 손을 얹었다.
"여기, 온수 줄기 맞냐."
"예. 겨울이면 이 배관 덕에 장부가 얼어붙지 않습니다."
"기록은 안 얼려도 사람은 얼려 죽이고."
눈을 감은 채 비꼬듯 말했다. 곧 기침이 컥, 하고 터졌다. 그는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피와 희미한 서리가 새어 나왔다.
연서경이 재빨리 손수건을 내밀었다.
"피 섞인 마력 침은 바닥에 두지 마십시오. 흔적 남습니다."
"네가 치우기 귀찮아서?"
"맞습니다."
말끝은 차갑게 던졌지만, 손수건을 받치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다시 피 냄새가 공간을 채웠다. 이번엔 서리 향보다 혈향이 더 짙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
"검시관."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손등. 아까 내 낙인 위에 올렸을 때."
"… 위쪽 흉터 말씀입니까."
"그거, 그냥 화상 아니지."
그의 시선이 손등에 걸렸다. 비늘처럼 울퉁불퉁한 상흔. 색은 옅어졌지만 만지면 아직도 미세하게 뜨거운 자리.
"그건."
말이 잠시 끊겼다. 마른 기침을 한 번 하고, 입안을 축였다.
"어릴 때 마력이 폭주했습니다. 그때 집에…"
이야기를 상세하게 풀 생각은 없었다.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불이 났습니다. 원인은 저였고요."
겉껍질만 골라낸 문장. 사건 기록처럼.
"손등으로 입구를 막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검시관이 된 거냐."
강진혁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
"그 일 때문에?"
"검시관이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연서경은 손등을 한 번 내려다봤다.
"황실이 지워 버린 제 가문 기록을 다시 적고 싶었습니다. 누가 읽든 말든, 남겨 두자. 그것뿐이었습니다."
"네 가족, 기록에서 지워졌어?"
"예."
이어서 잠깐 공기가 멎었다.
"사고사 처리. 화재로 전원 사망. 마력 폭주 원인 불명. 딱 네 줄입니다."
손이 자연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흉터 부위가 미세하게 뜨겁게 달아올랐다. 등 뒤의 젖은 벽이 땀과 섞여 차게 느껴졌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제가 해부하고 기록합니다. 지워지지 않도록."
"그 목록에, 나도 들어가는 거고."
"예. 이미 여러 번 올라갔습니다."
검시 보고서의 여러 항목이 머리를 스쳤다. ‘우측 폐 하엽 조직 손상.’ ‘서리 마력 잔존.’ ‘금속 파편 문양.’ 숫자와 문장이 줄줄이 떠올랐다.
"언젠가, 당신 사망 기록도 제가 쓰겠죠."
그 말은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조용히 내놓는 일이었다.
"그 말, 기분 나쁘다기엔…"
그가 코웃음을 났다.
"묘하게 안심된다."
"안심."
"적어도 네 손에 죽으면,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제대로 적히겠지."
그의 시선이 천장도 아니고, 바닥도 아니었다. 그녀 얼굴을 정면으로 향했다.
"실험체 번호 대신 이름으로."
연서경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익숙한 색의 분노가 일렁이는 걸 봤다. 지워진 자들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눈빛.
"대공마마."
호칭이 입 안에서 조금 무거웠다.
"지금부터 드리는 질문에는 장난치지 마십시오."
"해봐."
"이 낙인."
검게 옅어진 문양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당신 몸에 찍은 자. 황제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름을 잠시 머금었다가 내놓았다.
"좌의정 최도윤 쪽입니까."
공기가 한순간 서늘해졌다. 온수 배관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크게 부풀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강진혁 입꼬리가 느리게 휘었다. 웃음인지, 냉소인지, 혐오인지 모호한 각도였다.
"황제는 손에 피 묻히는 꼴을 싫어한다."
단조로운 목소리.
"생각은 좌의정이 했고, 인장은 황제가 찍었지."
"… 생체 성유물 프로젝트."
연서경이 낮게 중얼거렸다. 부친 노트 한쪽에 붙어 있던 제목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지워진 계절 – 북부 실험체 1호’
"그래. 북부 대공가 자식 하나쯤 갈아 넣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제도가 완성되면 영웅담 써 줄 테니 열심히 죽으라고."
그의 입가에서 쓴웃음이 흘렀다.
"처음엔 전장용 마력 증폭 장치였어. 나중에 바뀌었지. 죽은 놈들, 기록에서 날아간 놈들, 존재가 지워진 놈들을 내 폐에다 저장하는 시스템."
그가 가슴을 퉁, 두드렸다.
"살아 있는 증거실. 네 말대로, 쓰레기통."
"그래서."
연서경이 호흡을 정리하며 물었다.
"좌의정이 계절 살인을 설계할 때마다, 같은 도면이 당신 몸에도 새겨졌던 거군요."
"아마도."
그는 시선을 돌렸다.
"이번 연회도, 웃겼지."
짧게 웃다가, 금세 숨을 가다듬었다.
"하급 관리 폐에서 나온 금속 파편. 내 흉곽에 박힌 것과 같은 문양. 네가 병에 넣어 보여줬을 때, 바로 알았어."
"자기 설계도를 자기 몸 안에서 시험한 셈이지. 좌의정이 아니라, 나를 시약병 삼아서."
여기 공기까지 얹혀 묵직해졌다. 말이 끝날 때마다 뜨거운 숨과 차가운 증기가 섞여 묘한 냄새를 만들었다.
"목표는 뭡니까."
연서경이 물었다.
"좌의정 최도윤의 마지막 목표."
"신."
한 단어. 비웃음조차 안 섞인 건조한 소리였다.
"사계절 마력을 전부 제도 안에 넣고, 기록을 마음대로 편집하는 신. 겨울도, 봄도, 여름도, 가을도, 지워진 계절까지."
"지워진 계절."
혀끝에서 오래 맴도는 표현. 부친 노트 제목이 다시 떠올랐다.
"아까 네가 눌렀던 자리 있잖냐."
강진혁이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게 지워진 계절의 낙인 자리다. 법적으로 없는 계절.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 마력."
"하지만 당신 몸에는."
"찌르듯 선명하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 손이 방금 확인했잖아."
***
숨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지하의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온수 배관 옆 한쪽 벽에 열기가 모이는 지점. 증기 사이로 푸른빛이 점처럼 깜빡였다.
연서경이 고개를 돌렸다.
"저쪽, 보이십니까."
"눈이 아직 좀 흐리긴 한데… 빛이 있네."
벽 한가운데, 허공에 푸른 점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글자가 쓰였다 지워지는 것처럼.
"마력 인덱스 장치 같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손가락 끝으로 빛을 스쳐 보았다. 공기가 차갑게 반응했다.
푸른빛이 팡, 하고 퍼졌다. 얇은 막이 허공을 덮었다. 그 위로 숫자와 글자, 이름들이 푸른 줄로 정연하게 떠올랐다.
"살아 있는 장부."
말이 새어 나왔다.
"이 방식으로 숨겨 뒀군요."
강진혁이 뒤에서 다가와 옆에 섰다. 아직 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지만, 호흡은 일정했다.
"장부가 살아 있다고?"
"종이가 아니라, 마력으로 구조화된 데이터입니다."
연서경은 허공의 글자 하나를 눌렀다. 글줄들이 다시 정렬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 구조…"
눈을 좁히고 패턴을 읽었다.
이름: 필드.
날짜: 필드.
마력 유형: 배열.
실험 코드: 중첩.
한 줄을 누르면, 관련된 사건과 관계자, 사용된 계절 마력, 폐기 여부가 함께 펼쳐졌다. 연쇄적으로 묶여 있는 격자.
"조각 맞추기 좋아하겠네."
강진혁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퍼즐판이네, 완전."
"퍼즐이라면, 규칙도 있겠죠."
연서경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해부 도식 읽듯, 눈앞 구조를 머릿속에서 잘랐다 붙였다.
"이쪽이 ‘등록된 계절’입니다."
손가락을 옮기자, 각 줄 옆으로 색점이 빛났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쪽은 ‘폐기 대상’."
조금 옆, 글자가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라인이 있었다. 이름들이 흐려졌다 나타났다. 어떤 줄은 완전히 사라져 자리만 비어 있었다.
"그럼 지워진 계절은."
강진혁이 물었다.
"어디 숨겨놨는데."
"… 눈에 안 보이는 층일 겁니다."
연서경은 허공을 더 위로 훑었다. 손끝에 아주 가벼운 저항이 걸렸다. 투명한 막 같은 감촉.
"여기."
손가락으로 눌렀다.
짧게 정적이 흐른 뒤, 푸른빛이 다시 번쩍였다.
기존 장부 층이 얇게 갈라졌다. 그 밑에서 숨겨진 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빛과 푸른빛이 섞여 있는 코드. 글자라기보다는 기호에 가까웠다. { }, :, [] 같은 부호들이 마치 마력 회로도처럼 얽혀 있었다.
"… 이게, 지워진 계절."
연서경이 낮게 숨을 삼켰다.
"기록이 아니라, 설계도입니다."
"읽을 수 있어?"
"완전히는. 하지만 구조는 보입니다."
시야가 새로운 규칙에 적응해 갔다. 회로도가 펴지듯, 마력 구조와 인체 도식이 서로 겹쳐 보였다.
"여기, 폐. 여기, 심장. 여기…"
그녀는 허공의 기호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강진혁 검시 때 수없이 그렸던 해부 그림들이 머릿속에서 올라와 이 코드 위에 겹쳤다.
"… 당신."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 구조, 당신 몸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그가 코끝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뭘 할 거냐. 검시관. 장부 찾았고, 낙인 눌러 놨고."
"이 장부는 특정 혈통 마력에만 반응합니다."
연서경이 손을 거두었다.
"지금 반응하는 것, 보이시죠."
푸른 글자들이 그녀 손 움직임에 따라 따라 움직였다. 마치 시스템이 그녀 마력을 인식해 재배열하는 것처럼.
"… 황실 검시관 혈통."
강진혁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집안 피."
"예. 이 구조, 제 부친 흔적입니다."
목이 약간 조여들었다. 글자를 차분히 읽으려 해도 중심이 살짝 흔들렸다.
"그럼."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네 아버지도 지워진 계절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는 소리냐."
"… 기록상으로는."
연서경은 허공의 한 줄을 가리켰다.
"여기. ‘설계자’ 항목."
설계자: 필드.
처리: 필드.
보안 등급: 상위.
손끝으로 설계자 필드를 눌렀다. 이름 몇 개가 차례로 떠올랐다.
최도윤.
황제의 칭호.
그리고 마지막에—
익숙한 서체.
'延舒卿의 부친'
이름 대신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 폐기 대상이 아니라."
강진혁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설계자로."
혈관 전체를 누가 거꾸로 타고 올라오는 느낌. 발밑 돌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손끝 감각이 잠시 떠났다 돌아왔다.
연서경은 푸른 글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니겠지."
강진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기록이 조작됐을 수도 있—"
"기록은 늘 조작됩니다."
그녀가 말을 잘랐다. 시선은 여전히 허공의 글자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조작된 기록도 기록입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숨기려, 어떤 의도로 손댔는지. 그것도 증거니까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마른 공기와 습한 김이 동시에 폐로 쏟아졌다.
"제 부친이 실제로 무엇을 했든. 이 시스템이 그를 ‘설계자’라 부른 순간, 저는 그 사실과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
"당신 몸을 해부해서."
그녀가 한 박자 숨을 멈추고, 정확히 말했다.
"지워진 계절의 구조를 다시 그려야죠. 좌의정과 황제가 원하는 도면 말고, 제 눈으로 본 해부 도면으로."
강진혁 턱이 굳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까지의 농담조차 완전히 사라진 얼굴.
"그 말은."
"예."
연서경이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받았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버텨 주신다면. 당신 몸을 도려내는 그 순간까지."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 온수 배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더 커졌다. 증기가 두 사람 숨에 맞춰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 목숨 걸자는 거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네 부친 죄인지 공인지도 모를 설계도를, 내 몸에서 뜯어내려고."
"제 가족을 되찾기 위한 일입니다."
그녀는 잠시 옆으로 시선을 흘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당신 부하들. 북부에서 사라진 사람들. 오늘 죽은 하급 관리. 궁녀들. 모두 기록에서 지워졌습니다. 이 장부에는 그들이 ‘폐기 대상’으로 올라 있겠죠."
연서경이 손을 뻗어 다른 층을 열려는 순간, 강진혁이 그녀 손목을 잡았다.
"연서경."
처음으로, 이름만 불렀다. 호칭 없이.
"이건 네 혼자 떠안을 일이 아니다."
"혼자는 아닙니다."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있잖습니까."
그 말에, 그의 손이 순간 더 세게 그녀 손목을 조였다. 곧 힘을 뺐다.
"… 역시."
쉰 숨과 함께, 짧은 웃음이 나왔다.
"우린 같은 부류였지."
"지워진 자들."
연서경이 말을 이어줬다.
"그래."
그의 눈이 허공의 글자에서 그녀 얼굴로 돌아왔다.
"계약."
그가 말했다.
"황제 앞에서 했던 그 피계약 말고. 검시관과 실험체, 황실 부부라는 그 계약 말고."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
"지금, 여기서 새로 맺자."
"내용을 들어야죠."
"네가 날 끝까지 해부하고."
그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나는 네 이름이 기록에서 지워지지 않게 막는다."
간단하지만 무거운 제안.
"좌의정이든, 형조판서 윤성호든, 황제든. 네 이름 삭제하려 들면, 먼저 날 거쳐야 한다."
"효율은 좀 떨어지는 방패네요."
입 안 깊은 곳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지금껏 일부러 만들지 않던 연대 같은 모양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형체를 갖춰 갔다.
"저는 당신을 해부해 진실을 꺼내고."
그녀가 말끝을 그에게 넘겼다.
"난 그 진실이 다시 지워지지 않게 내 몸으로 막고."
그가 마무리했다.
"협잡 같네."
"의학이 정치랑 얽히면 항상 그렇습니다."
둘 사이에 짧지만 진짜 같은 웃음이 스쳤다. 증기 사이로 그 웃음이 고였다가 금세 흩어졌다.
연서경은 다시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럼, 계약 첫 단계."
살아 있는 장부의 가장 안쪽을 더듬었다. 코드 층을 넘기고, 폐기 대상 필드를 열고, 설계자 항목으로 들어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푸른 문자들이 천천히 모양을 잡았다. 이름들. 날짜들. 실험 코드.
마지막 줄.
시선이 거기에 꽂혔다.
'延舒卿의 부친 - 상태: 설계자 / 처리: 지연 / 주석: 다섯 번째 계절 착수'
숨이 반 박자 늦게 들이켜졌다. 심장이 한 칸 늦게 뛰었다.
"다섯… 번째 계절?"
강진혁이 옆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시선은 푸른 글자에 박힌 채였다.
"지워진 계절 말고도, 더 만들겠다는 건가."
푸른빛이 희미하게 떨렸다.
장부 어딘가, 다른 층에서 누군가 함께 이 페이지를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코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정되고 있는 기분.
공기 속으로 미세한 그림자 마력 냄새가 스며들었다.
연서경은 메스를 더 단단히 쥐었다.
허공의 글자들이 한 줄씩 흔들리며 재정렬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 장부를 실시간으로 다시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