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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종이 한 번 울렸다. 공기가 줄을 그은 것처럼 갈라졌다.
벽시계 초침이 또각또각 잘려 나갔다. 해부실 톱날 같았다.
연서경은 그 리듬에 숨을 맞췄다.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고.
침대 머리맡 테이블 위.
은빛 도구들이 좁은 등불 아래 가늘게 반짝였다.
청진기, 촉진봉, 잉크병, 가는 펜, 검은 가죽 노트.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하나씩 짚었다.
무게와 촉감, 각자의 자리를 확인했다.
빠짐없음, 그게 먼저였다.
침대 쪽에서 낮게 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은… 다음으로 빼먹으면 안 되나."
쉰 목소리, 피로와 비웃음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연서경이 고개를 들었다.
북부 대공의 침실은 아직 밤이었다.
두 겹 커튼 사이로 스며든 계절 마력이 옅게 떠다녔다. 얼어붙기 직전의 새벽 물안개처럼.
벽에는 황궁식 문양이 흐릿하게 떠 있었고, 촛불은 끝이 닳아 있었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남자. 강진혁.
목 위 단추 두 개만 풀린 셔츠. 나머진 군인답게 가지런히 잠겨 있었다.
눈밑 그늘은 깊었다. 눈동자만은 잠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해진 시각입니다, 대공."
연서경의 말투는 낮고 여백이 많았다.
"생체 검사 개시 기록 시간이 지났습니다."
탁.
노트 맨 위 여백을 펜촉으로 두드렸다.
종이가 아직 잉크를 모를 때 나는 짧은 진동.
새벽마다 똑같이 시작되는 의식이었다.
강진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검사 개시. 혼인 첫날밤도 이렇게 선언했지, 기억 나나?"
"혼인 첫날밤도 검사였으니까요."
말은 짧았다. 펜은 길게 움직였다.
〈황실 북부 대공 강진혁, 생체 검사 47회차. 시각, 오시 일각. 침상 자세, 반좌. 의식 명료.〉
잉크 냄새가 피와 섞였다.
그녀의 소매에 스민 마른 피, 포름알데히드의 싸한 기운이 새벽 찬 공기와 부딪혔다.
공기층 위로 계절 마력의 봄빛이 얇게 깔려 있었다. 녹지도 얼지도 않는 애매한 온도.
연서경은 의자를 끌어 침대 옆에 붙였다. 다리와 바닥이 마찰음 하나를 남겼다.
손 씻을 물그릇이 없는 것만 빼면, 이곳도 검사대였다.
"셔츠를 풀겠습니다, 대공."
단추가 풀릴 때마다 소리가 났다.
딱. 딱.
침묵은 거꾸로 늘어났다.
목, 쇄골, 흉골, 명치 아래까지 차례대로 드러났다.
피부는 좋아 보였다. 탄력 있고 따뜻했다. 겉으로만 보면 건강했다.
문제는 겉이 아니었다.
청진기를 들고 손바닥에 두세 번 톡톡 쳤다.
금속이 차갑게 깨어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대공. 폐가 어디서부터 접히는지,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적어야 합니다."
강진혁이 숨을 웃음처럼 털었다.
"명령조로 들려. 부인."
그러나 어깨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이미 군대식으로 훈련돼 있었다.
쇠가 피부에 닿는 순간, 그녀 손끝이 아주 짧게 튀었다.
닿은 자리만 국소적으로 식었다. 색이 옅어졌다.
숨 들어오고 나가는 길에서, 정상 호흡 사이사이 이상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젖은 나뭇가지가 안쪽에서 비틀리다 끊어지는 듯한 마찰음.
간헐적이었다. 리듬이 들쭉날쭉했다.
연서경은 눈을 감고 음을 잘랐다. 한 번, 둘, 넷.
끊어지는 위치와 간격을 머릿속에 찍었다.
손가락이 청진기를 미세하게 끌었다.
흉골 위에서 오른쪽, 세 번째 늑골 사이.
그 아래에서 온도가 변했다.
대부분은 체온이었다.
그러나 늑골 사이 몇 군데, 경계선 부근은 마치 살 안에 납과 얼음을 같이 심어 놓은 것처럼 단단하고 싸늘했다.
살아 있는 흉곽에서 느껴져서는 안 되는 온도였다.
"멈춰."
강진혁의 손이 갑자기 치고 올라왔다.
손목을 움켜쥐는 힘이 질겼다. 정맥이 도드라졌다.
연서경은 눈을 뜨고 그를 봤다.
눈가에 잡아 올라간 주름의 방향, 숨 들이쉬는 깊이, 소매 아래 흔들리는 힘줄.
과장은 아니었다. 고통이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밤새 욱신거리더니, 지금은 안쪽이 뜯기는 기분이야. 너도 들었잖아."
"그래서 더 들어야 합니다."
연서경은 잡힌 손 위에 다른 손을 포개 올렸다.
힘을 빼지 않고 방향을 바꿨다.
"계약 7조 2항. 대공께서 자의로 검사를 중단하실 수 있는 시간은, 황실의 종이 세 번 이상 울린 뒤입니다. 아직 한 번뿐입니다."
그의 눈동자가 얇게 찢어졌다.
"계약 조항까지 들먹여?"
"기록에 공백이 생기면, 나중에 누군가 임의로 채웁니다. 저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숨 한 번 멎듯한 침묵.
둘 사이 공기만 계절 마력에 얇게 주름졌다.
강진혁이 손을 풀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참… 고집 잘 키웠군. 황실이."
말끝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위로 같지만 칼날이 달린 말.
연서경은 받아치지 않았다.
청진기를 다시 옮겼다.
괴사 경계선 바로 위.
닿는 즉시, 무게가 거꾸로 올라왔다.
계절 마력이 응어리로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저릿한 전기가 튀었다.
겨울 물속에 손을 오래 담갔다 뺀 것처럼 감각이 둔해졌다.
청진기 표면에 얇은 서리 같은 빛이 한 겹 얹혔다가 금세 녹았다.
가슴 안쪽 소리는 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젖은 가지가 부러지는 마찰음 사이로, 아주 가는 금속 긁히는 소리가 섞였다.
맞물려야 할 시간이 비스듬히 엇갈린 채 서로 닳아 없어지는 소리였다.
연서경은 얕게 들이쉬고 바로 머리에서 위치를 맞췄다.
오른쪽, 세 번째와 네 번째 늑골 사이. 깊이, 엄지 두 마디 반.
노트가 빈 줄을 열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장기를 이렇게 자주 듣는 사람은 당신뿐이군."
강진혁이 중얼거렸다. 말투가 건조했다.
"지금은 귀로만 해부하지만… 언젠가 네 보고가 내가 어떻게 죽을지 정하겠지, 부인."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순간 튀었다.
청진기를 쥔 손이 아주 살짝 멈칫했다.
〈내부 소견, 우측 폐 하엽, 계절 마력 영향부 증가. 음향 패턴, 이전 대비 0.7배 불규칙.〉
"그러니 더 정확히 적겠습니다."
연서경의 시선은 노트 위에 고정된 채였다.
"어떤 방식으로 죽으시든, 기록에서 두 번 죽게 하진 않겠습니다."
잠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청진기 아래서 뛰는 심장 박동과 괴사 부근의 비틀리는 소리가 겹치면서도 맞지 않았다.
하나는 고집스럽게 일정했고, 다른 하나는 계절을 잃은 날씨처럼 요동쳤다.
문에서 노크가 들렸다. 일정한 간격.
"대공 각하, 곧 의전관이 도착합니다!"
문틈으로 시종의 목소리가 얇게 스며들어왔다.
"봄 연회 준비 시간이…"
"연회는 시체가 나오면 늦춰도 됩니다."
연서경이 노트를 덮으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생체 검사는 연기할 수 없습니다."
문 밖이 잠시 소란스러웠다가 곧 조용해졌다.
기다리겠다는 뜻인지, 더 밀어붙일 권한이 없다는 뜻인지 애매했다.
연서경은 청진기를 떼고, 괴사 경계선을 손가락으로 짧게 눌렀다.
살과 비정상 조직의 경계가 손끝에 분명했다.
살은 탄력이 있었고, 그 안쪽은 유리와 돌을 섞어 굳힌 듯했다. 차갑고 단단했다.
강진혁의 목 근육이 줄처럼 세워졌다.
입안 어딘가를 조용히 깨무는 입 모양.
손등에 힘줄이 솟았고, 침대 시트가 비틀려 주름을 만들었다.
"통증 강도, 열 기준."
연서경이 물었다.
"십을 가장 심한 것으로 했을 때, 지금은."
"일곱."
그의 숨이 짧게 끊겼다.
"가끔, 여덟."
숫자가 잉크로 남았다.
〈통증 7~8. 야간 증가.〉
검사 시각은 이미 정해진 범위를 조금 넘어 있었다.
그래도 패턴이 다 잡히진 않았다.
심장 위 마지막 지점을 들어야 했다.
청진기가 가슴 중앙으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다른 울림이었다.
심장은 여전히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주변 계절 마력의 흔적만 왔다 갔다 했다. 쫓기는 그림자처럼.
가느다란 삐걱임이 들렸다. 오래된 시계가 마지막 톱니를 억지로 돌리는 소리.
"기록 종료."
연서경이 짧게 선언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대공."
청진기가 떨어진 자리에는 흰 자국이 동그랗게 남았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노트 맨 아래 날짜를 쓰고, 이름을 덧붙였다.
〈황실 검시관 연서경 (延舒卿).〉
서명은 필요 없었다. 이 이름이 곧 서명이었다.
도구를 하나씩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각 도구가 만드는 그림자를 확인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진혁은 셔츠 단추를 천천히 잠그며 물었다.
"오늘 밤 연회, 꼭 가야 하나."
"대공 전속 검시관의 동반은 황실 명령입니다."
"황실 명령이라…"
그는 흐린 웃음을 흘렸다. "구경도 의무로 묶어 두는군. 도살장까지."
연서경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셔츠 안쪽에 숨은 괴사 경계선이 머릿속에서 정밀하게 떠올랐다.
오늘 밤 연회장 바닥에도 비슷한 경계가 그어질 것 같은 생각이 스쳐 갔다. 핏자국과 발자국,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
"도살장이 되지 않도록 기록하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하도록 문장으로 고정하는 일."
강진혁이 눈꺼풀을 반쯤 내렸다.
"그래. 오늘은 네 펜이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옷 갈아입고 오지. 부인."
연서경은 인사도 미소도 없이 고개만 짧게 숙였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기침 소리가 또 튀어나왔다.
마른, 짧은 기침. 이번엔 흉부가 아니라 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도 머릿속에 저장됐다.
다른 소리들 옆에, 나중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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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 입구는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황궁 계절 마력 조명이 오늘을 위해 전부 봄으로 설정돼 있었다.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빛의 막이 연초록에서 연분홍까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색이 겹겹이 얹혔다.
연서경은 의전관의 안내에 따라 형식적으로 강진혁의 팔에 손을 올렸다.
살이 닿지 않도록 장갑 끝만 소매 위에 얹었다.
멀리서 보면 다정해 보이는 거리. 가까이서 보면 계산된 틈새.
그 각도와 간격이 지금 둘의 관계를 설명했다.
문이 열렸다.
현악기가 일제히 음을 쏟아냈다.
잔들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 웃음, 낮게 숨기는 기침.
빛과 소리가 섞여 부풀어 올랐다.
공기는 무거웠다.
장미 향, 잘 익은 과일의 단내, 끓인 꿀의 끈적한 냄새가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로 포름알데히드와 마른 피 냄새가 아주 약하게 끝자락을 올렸다.
두 냄새층이 콧속에서 부딪히며 얕은 긴장을 만들었다.
문턱을 넘으며, 연서경의 시선은 장식이 아니라 길을 셌다.
왼쪽 벽 큰 문 하나, 오른쪽 작은 문 둘.
뒤쪽 발코니로 이어지는 계단, 위쪽 난간과 연결된 좁은 통로.
탈출 경로 셋, 돌려세울 수 있는 길 둘.
"부인."
옆에서 강진혁이 낮게 불렀다.
"지금은 구조대장이 아니라, 대공 부인이다."
"사체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동선을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연서경이 짧게 답했다.
"살아 계신 분들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라."
그가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죽은 자들만 상대하는 줄 알았는데."
"죽은 자의 기록이 살아 있는 자의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정면을 보며 말했다.
"기록이 없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의전관이 어수선한 웃음을 섞어 끼어들었다.
"대공 부부께서는 중앙에서 잠시 인사 나누시고, 그 뒤엔 외곽 쪽에서 편히 계시면 되겠습니다. 검시관 전하께서는… 음, 중앙에 오래 계시면 조금… 불길하다고들…"
끝까지 말하진 못했다.
자기 말에 스스로 주춤하는 얼굴이었다.
"외곽이 더 좋습니다."
연서경이 잘랐다.
"중앙에는 사체를 둘 곳이 마땅치 않으니까요."
의전관 얼굴빛이 중간 지점에 멈췄다.
웃는 것도 아니고, 화내는 것도 아닌 표정.
"예, 예. 그, 하하…"
강진혁이 옆에서 흐릿하게 웃었다.
"듣지 않겠다고 귀를 막을 수도 없지. 저이는."
그 말과 함께 잔을 들어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의무적인 인사와, 피곤한 정치가 그를 삼켰다.
연서경은 혼자 남았다.
연회장 외곽을 천천히 돌았다.
걸음은 연회장 예법대로였지만, 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경비 동선 확인.
근위병들의 위치, 시선의 방향, 창을 들고 서 있는 각도.
하인들이 접시를 들고 오가는 길, 사람들이 비워두는 공간, 막히는 지점.
사고가 나면 쏠릴 사람들의 흐름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치맛단을 정리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대리석 바닥의 미세한 경사가 눈에 들어왔다.
빛이 반사되는 각도로 미끄러운 구간과 마른 구간이 갈렸다.
피가 흐른다면 어디로 몰릴지, 자연스럽게 눈앞에 무늬가 펼쳐졌다.
"오늘 같은 밤에 검시관을 부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높고 달콤하고, 조금 과장된 음 높이.
천천히 돌아보니, 연분홍 드레스의 귀족 여자가 와인잔을 들고 서 있었다.
목에는 과장된 보석 목걸이, 손가락마다 반지가 빽빽했다.
향수는 사람 둘 거리를 채울 만큼 진했다.
그녀가 연서경의 옷매무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죽음을 초대해 놓고, 다들 너무 태연해서요."
옆에 서 있던 젊은 남자 둘이 살짝 웃음을 틀어쥐었다.
"해부실의 신부 아니야?" 한 명이 낮게 흘렸다.
"피 냄새가 이 향기를 이길까, 내기할까?" 다른 한 명이 맞장구쳤다.
향수 향이 한층 더 진하게 밀려왔다.
마치 일부러.
포름알데히드 냄새를 덮으려는 듯한 움직임.
연서경은 와인잔 대신 그 여자의 목 아래를 봤다.
고동치는 맥박. 생각보다 빨랐다.
불쾌감인지, 징조에 대한 미신인지, 어느 쪽이든.
"저는 죽음을 부르지 않습니다."
연서경이 말했다.
"그저,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하도록 문장으로 고정할 뿐입니다."
귀족 여자의 눈이 순간 멈췄다.
한 번 깜빡인 후, 마른 웃음을 붙였다.
"말씀도 참… 섬뜩하시네요, 검시관 전하."
"섬뜩함과 정확함은 자주 붙어서 나타납니다."
연서경은 입꼬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주위 웃음은 서서히 사라졌다.
대신 어색한 기침 소리 몇 개가 음악 사이에 끼어들었다.
현악기는 여전히 부드럽게 흘렀지만, 어딘가 음 하나가 미묘하게 밀려난 느낌이었다.
멀리 무대 쪽에서 누군가 연설을 시작했다.
황실의 봄, 계절 마력, 백성과 역사에 대한 상투적인 문장들.
말들은 길고, 내용은 가벼웠다.
연서경은 반쯤만 들었다.
귀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연설 뒤쪽.
하급 관리 하나가 서 있었다. 작은 배지를 단, 키가 약간 작은 남자.
손에 잔을 들고 있었는데, 잔이 아주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기침.
처음엔 가벼웠다. 귀찮게 목을 한 번 푸는 정도.
조금 뒤엔 간격이 늘어나고, 소리가 깊어졌다.
목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끌어올리는 소리였다.
숨 들이쉬는 소리도 거칠어졌다.
연설자의 목소리보다 그 기침이 더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잔을 잡은 손이 크게 흔들렸다.
붉은 술이 잔 가장자리까지 찼다가 넘쳤다.
조명 아래 술색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제멋대로 번졌다.
연서경은 자신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잔이었다.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였다. 소리를 잡기 위한 자세.
기침.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막혔다.
그 다음에 터져 나온 건, 기침이라 부르긴 무거운 소리였다.
붉은 것이 튀었다.
피만이 아니었다.
촉촉이 젖은 꽃잎 덩어리가 피와 함께 입 안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연회장 장식과 비슷한 색의 외부 조직.
하급 관리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잔이 손에서 떨어져 굴러갔지만 깨지진 않았다.
사람들의 비명이 여러 방향에서 터져 나왔다.
연서경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강진혁의 팔을 잡아 뒤로 당겼다.
"뒤로 가십시오, 대공."
그를 자기 등 뒤에 밀어 넣었다.
동시에, 왼손으로 자신의 드레스 옆선을 움켜쥐었다.
한 번에 아래로 찢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현악기 위를 가로질렀다.
치마가 허벅지 중간까지 갈라졌다.
연서경은 오른발 힐을 벗어 손에 쥐었다. 왼발 것도 즉시 벗었다.
맨발이 대리석에 닿았다.
차가운 감각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피가 아직 바닥을 덮기 전이었다.
그녀는 곧장 달려 나갔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식으로.
어깨, 팔, 등. 누구 것인지 상관없이 밀어냈다.
"비키십시오."
비명과 욕이 뒤섞였다.
연서경의 눈에는 쓰러진 사내의 위치만 또렷했다.
그와 자신 사이의 거리, 가로막는 사람들, 가장 빠른 선.
대리석 바닥에서 냉기가 튀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놀라 눈이 커진 젊은 귀족 남자의 몸이었다.
그녀는 그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밀어 코스를 틀었다.
두 번째는 접시를 든 하인이었다.
접시 위 음식이 휘청이며 과일 몇 개가 바닥을 굴렀다.
연서경은 그 틈 사이를 옆으로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갔다.
쓰러진 사내에게 도착했을 때, 이미 바닥에 붉은 막이 깔리고 있었다.
입 주위에서 계속 꽃잎과 피가 흘러 내려, 대리석 위에 점점 더 두꺼운 층을 만들고 있었다.
그 위를 맨발로 밟았다.
따뜻하고 점성이 있는 감촉이 발바닥에 들러붙었다.
바닥이 미끄러웠지만 몸이 먼저 균형을 잡았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동시에 긴장했다. 몸 전체가 잡아당기는 힘을 버텼다.
"물러나시오!"
두꺼운 음성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방패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연회장 한가운데 반원형 방패벽이 올라갔다.
철과 가죽이 한 번씩 소리를 냈다.
근위병들이 위치를 맞추며 원을 줄였다.
연서경도 방패 밖으로 밀려났다.
근위대장이 몸으로 앞을 막았다.
붉은 망토, 가슴에는 황실 문양이 도드라졌다.
"검시관, 물러나시오."
그가 팔을 벌려 앞을 가로막았다.
"황실의 봄 연회를 도살장으로 만들 순 없다. 여긴 아직 축제장이다."
"축제는 이 남자가 쓰러진 순간 끝났습니다."
연서경의 숨은 놀랍게도 안정적이었다.
"대공 칼릭스의 전속 검시관이자 법적 배우자로서, 제가 이 사망이 대공의 상태와 무관하다고 서명하기 전까지, 이 현장은 제 관할입니다."
웅성거림이 방향을 바꿨다.
'대공'이라는 단어에 귀족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어디선가 잔이 떨어지며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조금 늦게 퍼졌다.
근위대장의 얼굴이 굳었다.
눈동자가 짧게 떨렸다.
축제, 질서, 황실의 체면, 그리고 대공. 서로 다른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하는 눈빛이었다.
"검시관은 해부실에서 일하시오."
그는 아직 버티고 있었다.
"이곳은 황실 연회장이다. 피를 보는 곳이 아니다."
"이미 피를 봤습니다."
연서경이 잘게 끊어서 말했다.
"피를 본 순간, 이곳은 사건 현장이 됐습니다."
그녀는 그의 팔을 밀어내고 한 발 더 다가갔다.
"제가 서명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이 죽음을 '술에 취해 넘어져 사고사'로 적을 겁니다. 그게 황실의 질서입니까."
근위대장이 숨을 깊게 들이켰다.
욕이 입술 사이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삼켜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대신 주변을 훑어봤다. 수십 쌍의 눈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뒤쪽에서 노년 귀족의 낮은 목소리가 흘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끝까지 듣는 게 예의겠지."
작게 던진 말이 공기에서 방향을 틀었다.
근위대장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 빠르게 끝내시오."
방패를 든 병사 하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방패 한 쪽이 열렸다.
손 하나 들어갈 만큼 좁은 틈.
연서경이 간신히 몸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폭이었다.
"이 결론은 황실 기록에 그대로 남긴다."
근위대장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단, 그 문장에 따른 책임도 전적으로 당신 몫이라는 걸 기억하시오, 검시관."
"책임자가 필요하면 제 이름을 쓰십시오."
연서경이 틈 사이를 통과하며 말했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은 두 번 죽는 겁니다. 저는 적어도 두 번째는 막겠습니다."
---
방패 안쪽 공기는 더 짙었다.
피, 향수, 식은 음식, 인간의 열과 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조명은 봄빛이었지만, 이곳의 온도와 냄새는 계절을 잃어버린 채였다.
하급 관리의 얼굴은 이미 반쯤 색이 빠져 있었다.
입 주변에 젖은 꽃잎과 거품이 달라붙어 있었다.
눈은 반쯤 뜬 채 천장을 향해 굳어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놓앗다.
연서경은 무릎으로 바닥을 짚었다.
치맛자락이 피웅덩이에 흠뻑 젖었다.
직물 색이 금세 어두운 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 손으로 사내의 턱을 받쳤다.
다른 손으로 천 조각을 꺼내 입 주변 꽃잎과 거품을 걷었다.
젖은 살에 닿는 천이 미끄럽게 미끄러졌다. 끈적함과 차가움이 동시에 손에 남았다.
귀를 가슴 위에 댔다.
심장 소리는 없었다.
옆으로 조금 이동해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지고 난 뒤의 공백만 이어져 있었다.
"심장 정지."
짧은 선언 후, 허리춤에서 얇은 가죽집을 꺼냈다.
안에는 휴대용 메스, 작은 집게, 바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새벽 검사 때와 똑같은 배열이었다.
근위대장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검시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신을 옮기는 순간, 외상 소견이 뒤틀립니다."
연서경이 말끝을 잘랐다.
"이대로 열겠습니다."
주변에서 다시 웅성거림.
"여기서?"
"연회장 한복판에서?"
몇몇 귀족 여성은 얼굴에서 피가 쏙 빠졌다.
연서경은 치마를 넓게 펼쳤다.
사내의 상반신을 가리는 차폐천처럼 덮었다.
밖에서 보이는 건 피 묻은 천과 그녀의 어깨뿐이었다.
"보고 싶지 않으시면 보지 마십시오."
그녀가 말했다.
"다만, 들으셔야 합니다."
메스가 피부를 가르는 순간, 서걱이는 감촉이 손가락의 뼈까지 전달됐다.
건조한 천을 한 번에 찢는 느낌과 가까웠다.
피가, 내부 압력에 밀려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따뜻하고 단호하게.
시야가 피로 가리기 전에, 상처 가장자리에 손가락 두 개를 넣어 벌렸다.
피부와 피하 조직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미끈했고, 저항이 있었다.
한 손은 상처를 벌려 고정하고, 다른 손은 도구를 찾았다.
무릎 옆 바닥에 접어 다니던 간이 해부도를 펼쳤다.
방금 절개한 위치를 간단한 기호로 표시했다.
〈좌측 흉부, 늑골 3~5 사이.〉
기도와 폐로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살은 군데군데 갈라져 있었다.
마른 흙덩이를 손으로 눌렀을 때 생기는 균열처럼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이물 조직이 차 있었다.
틈 사이에서 에메랄드빛이 들쑥날쑥 깜빡였다.
심장이 멈춘 몸 안에서, 다른 박자가 혼자 뛰고 있었다.
빛 간격은 일정하지 않았다. 불안정한 숨처럼 꺼질 듯이 흔들렸다.
피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뜨겁고 무거운 냄새.
그 뒤를 따라 겨울 새벽 기운 같은 찬 냄새가 스며들었다.
전장에서 계절 마력으로 죽은 시신을 검사할 때 맡았던 이질적인 공기였다.
"폐 내부, 계절 조직 응고 확인."
연서경이 낮게 읊조렸다.
"자연 발생보다는 외부 주입 가능성 높음."
뒤에서 누군가가 "그만해라!"라고 외쳤다.
또 다른 목소리는 "연회장을 도살장으로 만들다니…" 하고 투덜거렸다.
근위대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입술만 더 얇아졌다.
상처 안쪽에서 손 끝이 단단한 물체에 닿았다.
살도, 응고된 피도 아닌 질감.
금속이었다. 얇지만 단단하게 박힌.
집게를 손에 쥐자, 손등 위로 계절 마력이 스치는 듯한 냉기가 올라왔다.
곧 열기가 뒤따랐다. 얼음 덩어리를 쥐었다가 바로 불에 갖다 댄 느낌.
손이 순간 떨렸다.
집게가 흔들렸지만, 그녀는 팔꿈치와 손목을 동시에 고정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자기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었다.
집게를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금속 조각이 걸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끌어 올렸다.
촛불 아래로 가져가자 은빛이 번쩍였다.
표면에 작게 새겨진 문양.
연서경의 눈이 좁아졌다.
그 문양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늘 새벽, 괴사 경계에서 집어 올렸던 파편 위에 있던 것.
대공 칼릭스의 인장.
연서경은 파편을 조금 더 높이 들었다.
빛이 부딪혀 문양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 이 문양."
그녀가 말했다.
"대공 칼릭스의 흉곽에서 이미 한 번 확인했습니다. 괴사 패턴 역시 이 폐의 변성과 같은 계열입니다."
연회장 전체에서 숨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겹쳤다.
비명 대신, 눌린 흡기.
입을 막는 손, 떨어지는 잔, 멈춰버린 웃음.
절개된 폐 안에서 에메랄드빛 조직이 아직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촛불과 봄 조명에 섞였다.
자연스러운 빛과 인공적인 빛이 겹쳐 괴상한 그림자를 바닥에 만들었다.
연서경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너무 부드럽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다.
실험적 계절 마력.
대공의 괴사와 동일 패턴.
외부 주입.
마치 누군가, 그녀가 이 결론을 큰소리로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
검시는 끝났지만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이번부터 그녀의 영역이 변했다. 몸에서 종이로.
연서경은 피 묻은 손을 천으로 대충 훑었다.
사체 옆 바닥에 노트를 펼쳤다.
피 한 방울이 종이 모서리에 떨어져 번졌다.
마치 붉은 인주를 찍은 것처럼 둥글게 퍼졌다.
손가락은 여전히 얼음과 불 사이를 오가는 듯 욱신거렸지만, 펜을 쥐기에 충분했다.
펜촉이 종이 위로 튀어 오르듯 달렸다.
〈사망 추정 시각: 연회 개시 후 약 일각.〉
외부 소견.
입 주변 장식용 꽃잎 색의 조직물, 구강 내 출혈, 쓰러진 위치.
내부 소견.
폐 조직의 갈라짐, 에메랄드빛을 띠는 계절 조직 응고, 빛의 반응.
이물질 항목.
〈은색 금속 파편 1점. 대공 칼릭스 흉곽 내 파편과 문양 일치.〉
대공과의 상관성.
펜이 짧게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글자들이 장기 배치를 따라 자리 잡았다.
방금 손가락으로 더듬었던 폐와 혈관의 위치가 머릿속 해부도 위에 뜨고, 그 위에 단어들이 꽂혔다.
자물쇠에 숫자를 하나씩 맞춰 넣는 듯한 느낌이었다.
노트가 채워졌을 때, 연서경은 천천히 일어섰다.
맨발에 밴 피의 끈적함은 그대로였다.
치맛단 곳곳의 피는 벌써 마르기 시작했다.
근위대장, 연회 책임자, 귀족들, 그리고 멀찍이 서 있는 강진혁까지.
모두 눈앞에 있었다.
음악은 끊겨 있었고, 촛불 타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공간을 채웠다.
연서경은 노트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은 옆으로 내려 두었다.
말을 꺼내기 전에 호흡을 맞췄다.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한 번.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황실 검시관 연서경 (延舒卿)."
근위대장이 말을 끌어올리려 했다.
"검시 기록은 황실 승인 없이는—"
"승인을 위한 보고입니다."
연서경이 말을 잘랐다.
"지금 이 공간에서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진 사람은 저입니다. 들으시고, 승인하십시오."
그의 어금니가 덜컥 부딪힌 소리가 가까이서도 느껴졌다.
하지만 더 나가지 못했다.
많은 눈이 그의 입을 대신 막고 있었다.
연서경의 시선은 노트가 아닌 허공을 향했다.
방금 머릿속에서 조립한 구조를 따라 문장이 흘러나왔다.
"사망 추정 시각, 봄 연회 개시 후 약 일각."
숨.
"외부 소견. 피해자는 황궁 하급 관리로, 연회장 중앙 무대 앞에서 돌발적인 기침과 호흡 곤란 후 전면으로 쓰러졌으며, 구강 내에서 다량의 피와 장식용 꽃잎과 동일한 색의 조직물이 확인되었습니다."
몇몇 귀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귀는 여전히 그쪽을 향해 있었다.
"내부 소견."
연서경의 목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가슴을 절개해 확인한 결과, 폐 조직 다수에서 수분이 빠져 균열이 생긴 흔적이 관찰되었고, 그 틈마다 에메랄드빛을 띠는 비자연적인 조직이 응고되어 있었습니다."
촛불 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얇게 공기를 긁었다.
시간이 조금 느려진 느낌이었다.
"해당 조직은 대공 칼릭스 흉곽 내 괴사 부위에서 관찰된 계절 마력 반응과 빛의 파장, 반응 방식이 동일합니다."
그녀는 잠깐 숨을 걸어두었다가 이어갔다.
"또한 폐 인접부에서 발견된 은색 금속 파편의 문양은 대공 칼릭스 흉곽 내 파편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다시 숨 들이마시는 소리가 여러 방향에서 섞였다.
'대공', '일치' 같은 단어들이 허공에 부딪혀 튀었다.
아무도 큰 소리를 내진 못했다.
마지막 문장만 남았다.
가장 무겁고, 가장 위험한 문장.
연서경은 펜을 쥔 손가락에 약간 더 힘을 줬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가 다시 원래 리듬으로 돌아왔다.
"본 검시관 연서경 (延舒卿)은…"
그녀는 또렷하게 발음했다.
"본 사망이 실험적 계절 마력에 의한 타살이며, 원인 패턴은 대공 칼릭스의 내부 괴사와 동일 범주에 속한다고 판별합니다."
말이 끝날 때까지 바닥 어딘가에서 쇠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듯한 감각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 떨림을 단어들과 연결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엔없었다.
짧고 무거운 정적.
근위대장이 마침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어깨는 조금 내려갔지만, 표정은 아슬아슬하게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 그렇다면 좋다."
그가 말했다.
"그 결론은 황실 기록에 그대로 남긴다. 단, 그 문장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 몫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검시관."
"책임을 나누는 것도 기록입니다."
연서경이 답했다.
"누가 들었고, 누가 승인했고, 누가 외면했는지까지."
사람들 틈 새 그림자에 서 있던 강진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하지만 눈동자 안에는 통증과 다른 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강진혁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보면 그냥 피곤해 보일 정도의 각도.
'네 판단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진 작은 동의.
연서경은 고개를 돌려 응답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를 천천히 덮었다.
어깨에 잔뜩 걸려 있던 긴장이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검시관 전하, 기분이 어떠십니까. 이런 밤에… 이런 결론을 내리고."
누군가가 속삭이듯 묻는 소리가 들렸다.
"구조입니다."
대답은 짧았다.
"무너지는 이야기를 다시 세우는 일."
근처에서 낮은 웃음이 흘렀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
강진혁이었다.
"축하하지, 부인."
그가 조용히 말했다. 가까운 사람만 들을 수 있는 거리.
"오늘 밤 황궁은 처음으로 네 펜에 피를 허락했군. 기분이 어떤가? 아직도 이걸 구조라고 부를 수 있나?"
연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대신, 노트를 들고 연회장 가장자리의 그늘진 곳으로 걸어갔다.
해야 할 마무리가 남아 있었다.
---
기둥 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조용한 빈틈.
연서경은 다시 노트를 펼쳤다.
임시 기록을 정식 검시 보고서 형식으로 옮겨야 했다.
날짜. 황궁식 연호와 계절 표기.
시각. 연회 개시 기준.
장소. 황궁 봄 연회장 중앙.
〈검시관: 황실 검시관 연서경 (延舒卿).〉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잉크가 조금 굵게 번졌다. 피 얼룩과 닿은 탓이었다.
방금 입으로 낭독한 결론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조사 하나까지 틀리지 않게.
눈에 보이지 않는 틀 위에 문장을 억지로 끼워 넣는 느낌이었다.
〈본 검시관 연서경 (延舒卿)은 본 사망이 실험적 계절 마력에 의한 타살이며, 원인 패턴은 대공 칼릭스의 내부 괴사와 동일 범주에 속한다고 판별합니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펜촉 끝에서 종이로 힘이 깊게 들어갔다.
글자 아래 종이가 살짝 움푹 파였다.
필압까지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다시 적었다.
꾸밈 없는, 평소 그대로의 글씨. 단정하고, 꺾이는 곡선이 적었다.
"시종."
연서경이 손짓했다.
젊은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노트를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
피 얼룩, 눌린 글자, 현장 냄새까지 배어 있는 종이.
"이걸 기록 보관실로 가져가십시오."
연서경이 말했다.
"혈흔과 필압 그대로 보존하라."
시종이 난처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검시관 전하, 규정상 원본은 중앙 보관함에 봉인하고, 정제된 사본만 열람해야 합니다. 피 얼룩은… 다시 보기에도, 불경스럽고…"
"피 얼룩과 눌린 글자가 증거입니다."
연서경의 눈빛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
"사본으로 바꾸는 순간, 이 죽음은 한 번 더 삭제됩니다."
시종은 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대공 각하의 존함이 직접 언급된 보고서라, 원본을 그대로 유통하는 건 위험할 수도…"
두려움과 계산이 섞인 얼굴이었다.
규정, 상관, 그리고 자신의 목숨.
"절충안을 쓰죠."
연서경이 말했다.
"원본에 황실 인장을 직접 찍으십시오. 변형 불가 공식 기록으로 편입됩니다. 그러면 아무도 이 문장을 고치지 못합니다."
시종의 눈이 흔들렸다.
"인장을… 여기서요?"
"여기서. 지금."
잠깐의 주저 끝에, 시종은 허리춤에서 작은 인장함을 꺼냈다.
붉은 왁스와 황실 문양이 새겨진 인장.
보통은 문서실 깊숙한 곳에서나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작은 숯불 위에 금속 숟가락이 올려졌다.
왁스를 조금 떼어 올려놓자, 금세 녹아 투명한 붉은 액체가 되었다.
뜨거운 왁스 냄새가 피 냄새와 뒤섞여 무거운 공기를 만들었다.
녹은 왁스를 노트 모서리에 떨어뜨렸다.
붉은 방울이 둥글게 퍼졌다.
그 위로 황실 인장이 천천히 내려갔다.
퍽.
짧고 둔탁한 소리.
왁스와 금속, 종이가 한 번에 서로를 눌러 찍는 소리.
연서경의 무릎 아래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진동이 발바닥에서 종아리, 무릎,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얼음 아래 깊은 곳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방향을 바꾸는 느낌.
시야 테두리가 아주 짧게 어두워졌다가 되돌아왔다.
연서경은 눈썹을 좁혔다.
"… 지금, 느끼셨습니까?"
시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전하?"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눈이었다.
연회장 안쪽에서는 다시 음악이 조심스럽게 시작되는 중이었다.
웅성거림도 조금씩 원래의 온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닙니다."
연서경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노트 잘 보관하십시오. 한 글자도 지우지 말고."
"예, 전하. 이 원본은 곧바로 중앙 보관함 최내층에…"
시종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변형 불가 기록으로 올리겠습니다."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서경은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끝에 말라붙은 피를 천으로 한 번 더 닦았다.
손등에서 아직도 냉기와 열기가 번갈아 밀려오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연회장 바닥의 떨림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황궁 다른 곳에서는, 다른 떨림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황궁 온실.
유리 천장 아래 계절 마력이 만들어낸 봄빛이 갑자기 도리어 푸르게 번쩍였다.
한순간, 온실 안의 잎사귀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그림자를 던졌다.
병영 지구의 겨울 마력등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졌다.
살이 시릴 만큼 맑은 흰빛이 자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몇몇이 잠결에 몸을 뒤척였지만,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인 숙소 복도의 계절 조명은 한 박자 동안만 계절을 헷갈렸다.
봄과 가을, 겨울과 여름이 동시에 켜졌다가, 다시 각 자리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눈을 비볐고, 누군가는 전등이 나간 줄 알았다.
황궁 깊은 어딘가, 보이지 않는 층.
오래전에 설계된 회로가 방금 입력된 문장 구조를 정확한 형식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실험적 계절 마력에 의한 타살이며, 대공 칼릭스와 동일 범주.〉
문장과 서명, 인장이 하나의 열쇠가 되어 꽂혔다.
계절 살육 회로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동을 시작했다.
연서경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피로 젖은 맨발의 감각과, 방금 적은 한 문장이 몸 밖 어딘가로 계속 흘러가는 듯한 낯선 느낌뿐이었다.
자리를 뜨려는 순간, 바닥이 아주 살짝 기울어지는 감각이 다시 스쳤다.
어지럽진 않지만, 신경을 긁는 정도의 변위.
연서경은 발을 멈췄다.
시야 가장자리가 한 번 더 흔들렸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퍼즐 조각 하나가 다른 곳에서 맞춰지고 있는 그림이 떠올랐다.
발끝 쪽으로 쏠리던 피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새벽에 적어 내려간 문장과 방금 완성한 결론 문장을 차례로 떠올렸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대신해 문장을 고르는 사람.
지금 이 황궁에서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연서경 (延舒卿).
그 이름 위에 떨어졌던 인장의 퍽 하는 소리가, 늦게 터지는 메아리처럼 귀 안에서 다시 울렸다.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명령인지,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감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