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었다. 뒤틀린 철근이 뼈대처럼 솟아올랐고,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거대한 무덤의 비석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비릿한 쇠맛을 머금은 매캐한 연기가 허파 깊숙이 침투해 발작적인 기침을 유도했다. 서훈은 떨리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손끝에 닿는 아스팔트의 감촉은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차가웠다. 부서진 보도블록 사이로 스며 나오는 고대의 힘은 검은 잉크가 물속에서 번지듯 그의 신경망을 잠식해 들어왔다.
서훈은 신음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찢어진 옷소매 사이로 드러난 살결에 겨울바람이 면도날처럼 박혔다. 눈앞이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게 번졌다. 공중에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은 한때 낙원을 꿈꾸던 이들의 부서진 파편처럼 허망하게 흩날렸다. 귓가에는 봉인이 깨질 때 났던 그 날카로운 파열음이 이명으로 남아 뇌를 찔러댔다.
"거기, 누구 없어요?"
서훈의 목소리는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건물의 육중한 붕괴음뿐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무릎이 꺾이며 몸이 기울어지자,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가로등 기둥을 붙잡았다. 기둥은 이미 반쯤 휘어져 있었고, 벗겨진 페인트의 거친 질감이 손바닥을 사정없이 긁어놓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아수라장이 된 광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시수호파의 푸른 문양이 새겨진 차량들은 뒤집힌 채 검은 연기를 뿜어냈고, 원류파의 검은 깃발은 불타는 잔해 속에서 재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양 진영 모두 치명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누구도 승리 깃발을 꽂지 못한, 오직 패배자들만 남은 전쟁의 흔적이었다.
서훈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척추를 타고 얼음물이 흐르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다. 고대의 힘을 억지로 잠재우려 했던 대가는 가혹했다. 몸 안에서 날뛰는 마법의 잔향이 신경 마디마디를 톱질하는 기분이었다.
"서훈 씨! 정신이 들어요?"
멀리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이서하였다. 그녀의 얼굴은 그을음과 굳은 피로 얼룩져 엉망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깊은 호수처럼 맑게 빛났다. 이서하가 서훈의 어깨를 단단히 부축했다. 그녀의 온기가 옷을 뚫고 전달되자, 서훈은 비로소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이서하 씨... 다른 사람들은요?"
"다들 뿔뿔이 흩어졌어요.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건물이 언제 더 무너질지 몰라요."
그녀의 말대로 주변의 대형 빌딩들이 위태로운 각도로 기울어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봉인이 완전히 닫히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열리지도 않은 애매한 균열 상태가 서울의 물리적 구조를 뒤흔드는 중이었다. 서훈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최악의 파멸을 잠시 뒤로 미루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무너진 지하도 입구 근처에서 신음하는 생존자들을 발견했다. 도시수호파 요원 한 명과 원류파 대원 두 명이 서로를 경계하며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고, 동공은 잘게 흔들리며 극심한 공포를 드러냈다.
"총 내려놔요! 지금은 서로 죽일 때가 아니라고요!"
서훈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말에 미세한 마력이 실리자 주변 공기가 징 소리를 내듯 진동했다. 요원들이 주춤하며 서훈을 바라보았다. 원류파 대원 중 한 명이 바닥에 핏물을 뱉으며 악을 썼다.
"네놈이... 네놈이 다 망쳤어! 봉인을 완전히 풀었어야 했다고!"
"그래서 다 같이 지옥으로 가자고? 이 도시를 통째로 수장시키고 싶었던 거야?"
서훈이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때, 머리 위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지하도 입구를 간신히 지탱하던 기둥에 깊은 균열이 가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서훈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몸 안에서 잠자던 힘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고동쳤고, 시야가 서늘한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서훈은 봉인의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에너지를 억지로 끌어당겨 손바닥에 집중시켰다. 그것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 덩굴을 맨손으로 움켜쥐는 것과 같은 고통을 동반했다.
"으아악!"
서훈의 팔에 푸른 혈관이 밧줄처럼 툭툭 불거졌다. 마법을 휘두르는 비용은 육체적인 파괴로 지불되었다. 피부가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미세하게 찢어지며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쏟아지는 잔해들을 공중에서 억지로 멈춰 세웠다.
"지금이에요! 빨리 도망쳐요!"
이서하가 생존자들의 등을 거칠게 밀치며 안전한 곳으로 유도했다. 요원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훈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훈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입안에서 비릿한 금속 맛이 확 퍼졌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마지막 생존자가 구역을 빠져나가는 순간, 서훈은 붙잡고 있던 힘을 놓았다. 굉음과 함께 콘크리트 더미가 지면을 강타하며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켰다. 서훈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을 통해 지면의 기분 나쁜 진동이 전해졌다. 땅 밑 깊은 곳에서 고대의 힘이 둔탁한 심장 박동처럼 울리고 있었다.
"미친 짓이었어요. 몸이 이 지경인데..."
이서하가 달려와 그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서훈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 끝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지만, 그녀의 체온이 스며들며 감각을 깨웠다.
"그래도... 살렸잖아요."
"당신부터 살아야죠. 제발 좀!"
이서하는 화난 듯 소리쳤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서훈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도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닻이었다.
두 사람은 폐허를 가로질러 이동했다. 길가에 버려진 차량들은 마치 탈출을 꿈꾸다 멈춰 선 거대한 강철 짐승들의 시체 같았다. 서훈은 광장 중앙의 봉인 지점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금이 간 문양 사이로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괴물의 음산한 숨결처럼 보였다.
"저게 정말 잠든 걸까요?"
서훈이 나직하게 물었다. 이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불길한 진동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양 진영의 지휘관들은 어디선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혼란을 틈타 더 큰 권력을 쥐려 할 것이고, 누군가는 실패의 책임을 서훈에게 돌릴 궁리를 할 터였다.
"일단 여기서 멀어져야 해요. 제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가 근처에 있어요. 거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거예요."
이서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낡은 상가 건물의 반지하 분식집이었다. 입구의 네온사인은 깨져 있었지만, 안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이정표처럼 보였다. 서훈은 이서하의 어깨에 기댄 채 좁은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갔다.
가게 안은 눅눅한 공기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대비되는 따뜻한 온기가 피부에 닿자 서훈은 긴장이 풀리며 몸을 떨었다. 이서하는 그를 구석진 테이블 의자에 앉히고 낡은 히터를 켰다.
"잠시만 기다려요. 뭐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리죠."
이서하는 주방으로 들어가 가스레인지를 켰다.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서훈은 비닐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운 바람이 젖은 양말과 바지를 서서히 데워주었다. 발가락 끝부터 감각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 두 그릇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짭조름하고 매콤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며 식욕을 돋웠다. 서훈은 젓가락을 들려 했지만, 손이 심하게 떨려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젓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 부딪히며 챙그랑 소리를 냈다.
"이리 줘요. 내가 먹여줄게요."
이서하가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가져갔다. 그녀는 면발을 후후 불어 서훈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서훈은 쑥스러웠지만, 거절할 기운조차 없었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굳어 있던 장기들이 비로소 온기를 되찾고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맛있네요. 평소엔 이런 거 잘 안 먹었는데."
"시장이 반찬이라잖아요. 그리고 이건 제가 특별히 끓인 거니까 더 맛있을걸요?"
이서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농담에 서훈도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현실적인 재난의 현장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라면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기묘했다. 하지만 이 소소한 일상이야말로 그가 지키고 싶었던 평화의 본질일지도 몰랐다.
"이서하 씨, 나중에... 이 일이 다 끝나면요."
서훈이 국물을 마시다 말고 입을 열었다. 이서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전쟁이 끝난 뒤의 일상이 오면, 그때도 이렇게 라면 끓여줄래요?"
이서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서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녀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손등에 박힌 굳은살은 그녀가 살아온 치열한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라면만 줄 것 같아요? 더 맛있는 거 사달라고 조를 거예요. 그러니까 죽지 마요. 알았죠?"
"노력해 볼게요. 설거지는 제가 할 테니까."
서훈의 자기비하 섞인 농담에 이서하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좁은 반지하 가게에서 작은 위안을 공유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사이렌 소리와 헬기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 공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격리된 섬처럼 평온했다.
식사를 마친 서훈은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이서하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서훈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재킷에서는 그녀 특유의 시원한 세제 냄새와 약간의 땀 냄새가 섞인 인간적인 향기가 났다.
"잠깐 눈 좀 붙여요. 제가 망보고 있을게요."
"이서하 씨도 피곤할 텐데..."
"전 괜찮아요. 요원 훈련 받을 때 사흘 밤낮도 새본 적 있다고요."
이서하는 서훈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서훈은 그녀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의식의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히터의 일정한 바람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봉인 아래에서 느꼈던 그 기이한 진동을 떠올렸다.
'내가 정말 제대로 한 걸까.'
마지막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서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잘했어요, 서훈 씨. 오늘 당신이 아니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예요. 그거면 됐어요."
그녀의 위로는 완벽한 해답은 아니었지만, 서훈의 마음속 응어리를 조금은 녹여주었다. 그는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눈 덮인 서울이 아닌, 태양이 내리쬐는 푸른 바다 위를 걷고 있었다. 그곳은 탈출하고 싶었던 현실이 아닌, 도달하고 싶었던 진정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서훈이 깊은 잠에 든 순간, 반지하 가게의 바닥 타일 아래에서 미세한 울림이 발생했다. 그것은 히터의 진동도, 바깥의 붕괴음도 아니었다. 땅 밑 깊숙한 곳, 봉인의 잔해 속에서 아주 작지만 분명한 심장 박동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마치 이제 막 부화를 시작한 알 속의 생명체처럼, 고대의 힘은 서훈이 잠든 틈을 타 새로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전한 봉인도, 완전한 해방도 아닌 제3의 길을 향한 태동이었다. 잠든 서훈은 그 불길한 전조를 느끼지 못한 채, 이서하의 온기 속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서울의 밤은 길었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도시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전쟁의 배후에서 이 모든 것을 설계한 자들은 이제 막 다음 장을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훈의 재킷 주머니 속에 있던 데이터 분석기가 미세하게 깜빡였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나열되며 시스템이 재가동되고 있음을 알렸다. 스위치는 켜졌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하의 어둠 속에서 검은 물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도시의 모든 인공적인 구조물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가장 낮은 곳부터 침식해 들어갔다. 낙원을 꿈꾸던 자들의 환상은 깨졌고, 이제 남은 것은 차가운 현실과 그보다 더 차가운 고대의 진실뿐이었다.
서훈은 꿈속에서 이서하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가 붙잡고 있는 것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온기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밖에서는 또 한 번의 붕괴음이 들려왔고, 서울의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잠든 서훈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휴식이 폭풍 전의 고요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주할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사실을.
봉인 아래의 심장 박동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경고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의 예고인가. 대답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무너진 광장의 잔해만이 침묵 속에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서하의 숨소리가 서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 역시 짧은 졸음에 빠져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반지하 벽면에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는 마치 하나로 합쳐진 거대한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고, 서로를 지탱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밤은 깊어갔고, 서울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 박동이 멈추는 날이 올지, 아니면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폭발로 이어질지는 오직 시간만이 알고 있었다. 서훈은 그 어둠 속으로 더 깊이,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