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에서 내려앉는 눈송이는 까끌거리는 모래알 같았다. 서울의 폐허가 된 거리는 지독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한서준은 무거운 등산화를 내디디며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사이를 가로질렀다. 보폭이 조금씩 넓어진다. 그의 목적지는 명확했다. 과거, 자신의 오판과 시스템의 냉혹함이 맞물려 수많은 인명을 삼켜버렸던 소규모 피난처의 터였다.
매캐한 탄내와 습한 흙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서준은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건물 계단 아래로 몸을 숙였다. 발밑에서 얼어붙은 쓰레기와 깨진 유리 파편이 서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장갑을 벗고 거친 바닥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은 날카로운 얼음 송곳처럼 시렸다. 마침내 깊숙한 틈새에서 낡은 천 주머니 하나가 손에 잡혔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겠노라 약속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한 한 아이의 부적이었다.
부적을 움켜쥐자 폐부 깊숙이 찬 공기가 박혔다. 손등에 새겨진 오래된 문양이 희미한 인광을 내뿜기 시작했다. 마력이 혈관을 타고 요동치자, 달궈진 인두로 살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문양이 갈라지며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핏방울은 하얀 눈 위로 떨어져 붉은 꽃처럼 번져나갔다. 서준은 이를 악물며 부적에 걸린 봉인을 비틀어 열었다.
"아저씨, 우리 이제 나가는 거예요?"
아이의 떨리는 숨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긁었다. 멀어져 가는 사이렌 소리와 무너지는 건물의 굉음이 환청처럼 그를 덮쳤다. 시야가 좁아지며 세상이 하나의 구멍으로 수렴했다. 후회가 끈적한 그을음처럼 달라붙어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손등에서 흐르는 피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적셨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거친 목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서준이 고개를 들자 낡은 외투를 걸친 생존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날 선 경계와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한 명은 녹슨 쇠 파이프를 쥐고 있었고, 옆의 남자는 큼직한 돌멩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봐, 당신 한서준 아니야? 그때 우리를 버리고 갔던 그 마법사 맞지?"
한 남자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다가왔다. 서준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손등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 묻은 부적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맞습니다. 내가 한서준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어떤 변명도 섞이지 않은 무거운 음성이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공기를 데웠다. 그들에게 한서준은 영웅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명령을 받들어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배신자일 뿐이었다.
"그날, 여기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내가 내린 결정 때문에요."
서준은 그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군중 사이에서 한 여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손에는 반쯤 비어 있는 플라스틱 물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서준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내 동생 민수, 기억해? 당신이 호송차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 애가 안에서 울고 있었다고!"
여자의 비명과 함께 물병이 날아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물병이 서준의 어깨를 때리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미지근한 물이 뺨에 튀어 흘러내렸다. 주변인들이 웅성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어떤 이는 그가 다시 마법을 부릴까 봐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지만, 어떤 이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어깨를 들썩였다.
"민수 군의 이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압니다."
서준은 뺨에 흐르는 물을 닦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사과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이 도시가 다시는 누군가를 도구로 쓰고 버리는 구조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 나를 벌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그전에 내가 하려는 일을 봐주십시오."
여자는 분노에 찬 숨을 내쉬며 쇠 파이프를 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서준의 피 묻은 손등과 그가 소중히 쥐고 있는 낡은 부적을 번갈아 보았다. 적개심과 의구심이 뒤섞인 기묘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와서 착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남자가 비아냥거렸다. 서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짊어진 죄책감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요. 착한 척이 아니라, 책임을 지려는 겁니다. 전면에서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밑바닥에서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기둥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눈발이 굵어지며 시야를 가렸다.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 무렵,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추워요.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말해."
그녀가 가리킨 곳은 인근에 설치된 임시 쉼터 컨테이너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서준이 뒤따라오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임시 쉼터 컨테이너 내부는 눅눅한 온기와 난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탁한 열기로 가득했다. 구석에는 낡은 담요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서준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휴대용 포트에 물을 올렸다. 손등의 문양이 다시 욱신거렸다. 마력을 소모한 후유증으로 손이 떨려 컵을 몇 번이나 떨어뜨릴 뻔했다.
"자, 이거 마셔요."
서준은 뜨거운 물에 허브차 티백을 우려내어 종이컵에 담았다. 은은한 풀내음이 컨테이너 안의 매캐한 공기를 조금씩 밀어냈다. 그는 가장 먼저 구석에서 떨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그의 손등에 있는 피 묻은 문양을 보고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무서워할 것 없어. 이건 그냥 흉터 같은 거란다."
서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두꺼운 장갑을 벗어 아이의 작은 손에 씌워주었다. 그리고 따뜻한 종이컵을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컵을 감싸 쥐더니, 조금씩 온기를 느끼는 듯 표정이 풀렸다.
"난로 옆에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돼. 이 난로는 낡아서 불꽃이 튈 수도 있거든. 알았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서준은 다른 생존자들에게도 차례로 종이컵을 건넸다. 몇몇 어른들은 "이제 와서 이런 걸로 점수를 따려고?"라며 투덜거렸지만, 건네받은 컵의 온기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좁은 공간에 허브차의 향과 사람들의 낮은 숨소리가 섞였다. 이곳은 폐허 속의 작은 낙원처럼 느껴졌다.
"아저씨는 왜 우리를 도와줘요? 아까는 무서운 사람 같았는데."
장갑을 낀 아이가 물었다. 서준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자세를 낮췄다.
"내가 예전에 큰 실수를 했거든. 그래서 너희는 나 같은 어른이 되지 말라고 알려주러 온 거야.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하고, 누군가 너를 도구로 쓰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해."
아이는 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서준이 건넨 장갑의 따뜻함만큼은 믿는 듯했다. 서준은 그 순간, 자신이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보다 이런 작은 온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았다. 유산이란 화려한 명성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최소한의 안전과 올바른 질문이어야 했다.
차를 다 마신 뒤, 서준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금속 벽에 기대자 허리를 타고 냉기가 전해졌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여전히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군."
익숙한 목소리에 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벽 너머에서 이서하가 껌을 씹으며 서 있었다. 그녀는 한때 서준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지만, 그의 배신 이후 가장 격렬하게 그를 비난했던 동료였다.
"왔어?"
서준이 짧게 인사를 건넸다. 서하는 대답 대신 발끝으로 자갈을 툭툭 찼다.
"사람들이 당신을 다시 대표로 세우고 싶어 해. 양 진영 잔존 세력들이 모여서 회의를 연다더군. 당신이 없으면 구심점이 안 생긴다나 뭐라나."
"난 가지 않아."
서준의 단호한 말에 서하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도망치겠다는 거야? 아니면 이제 와서 성인군자라도 된 것처럼 뒤에 숨겠다는 건가?"
"도망치는 게 아니야. 역할이 바뀐 거지."
서준은 서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널 버리고 갔던 건, 내 변명할 수 없는 선택이었어.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그래서 난 더 이상 누군가를 대표해서 결정 내리는 자리에 서지 않을 거야."
서하는 껌을 씹는 동작을 멈췄다. 그녀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그럼 뭘 하겠다는 건데? 그냥 여기서 애들 장갑이나 끼워주며 살겠다고?"
"기록하고, 감시하고, 조정할 거야. 시스템이 다시 폭주하지 않게,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게 만드는 뒤편의 역할을 맡을 생각이야. 네가 원한다면 그 과정에서 나를 감시해도 좋아."
서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멀리서 발전기가 돌아가는 둔중한 진동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그녀는 고무줄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건조한 마찰음을 냈다.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그 '뒤편'이라는 자리, 꽤 피곤할 텐데."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내 방식의 책임이야."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지만,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는 조용한 공존의 공기가 형성되었다. 서하는 다시 껌을 씹으며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서준은 다시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낡은 기록 노트를 꺼냈다. 그 안에는 전쟁 동안 자신이 관측한 데이터, 마법의 구체적인 비용과 부작용, 그리고 실패했던 작전들의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는 쉼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던 한 젊은 생존자를 불렀다.
"이걸 네게 맡기고 싶다."
서준은 피 묻은 부적과 노트를 청년에게 건넸다. 청년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제가요? 전 이런 걸 다룰 줄 모릅니다. 이건 당신 같은 사람들이나..."
"아니, 이건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이 가져야 해."
서준은 노트를 펼쳐 마지막 페이지에 손을 올렸다. 그는 남은 마력을 쥐어짜 보호 마법을 시전했다. 손등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솟구쳤고, 목구멍이 덧나며 매캐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결국 참지 못한 코피가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짠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 노트에는 잠금을 걸어뒀어. 네가 정말로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만 열릴 거다. 이 안에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들이 다 적혀 있어."
주변 어른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왔다.
"그걸 왜 애한테 줘? 당신이 직접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를 도와줘야지!"
"내가 가진 힘은 독입니다."
서준은 휘청거리는 무릎을 간신히 지탱하며 말했다.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시스템은 반드시 망가집니다. 여러분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서 책임을 떠넘기려 하지 마십시오. 이 기록을 보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그리고 진짜 수혜자가 누구였는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젊은 생존자는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노트를 받아 들었다. 종이 모서리에 말라붙은 피의 거친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형, 만약 우리가... 당신들처럼 되면요? 그때는 누가 우리를 막아요?"
청년의 날카로운 질문에 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그것은 정답을 줄 수 없는 선배 세대의 고통스러운 고백이자,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무거운 과제였다.
멀리서 회의 소집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서준은 컨테이너 문가에 서서 눈 덮인 서울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전면에 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기록과 질문들은 차가운 눈 밑에서 씨앗처럼 숨 쉬며, 언젠가 찾아올 새로운 봄을 준비할 것이다. 코피가 바닥에 떨어져 먼지와 섞이며 검게 번져갔다. 그의 유산은 이제 그의 손을 떠나, 새로운 세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