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같은 강바람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헤집고 들어왔다. 한강은 은색 비늘을 곤두세운 채 잠든 거대한 파충류처럼 보였고, 그 위로 흩날리는 눈보라는 시야를 하얗게 지워버렸다. 도윤은 코트 깃을 여미며 제단으로 향하는 석조 계단을 밟았다. 발을 뗄 때마다 얼어붙은 대지가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등 뒤로 수천 명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그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무거운 납 덩어리를 어깨에 얹어놓은 듯한 압박감이었다.
제단 중심에는 첫 수호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고대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의 표면은 오랜 세월 풍파에 깎여 거칠고 갈라진 손등 같았다. 그 앞에 멈춰 서자 허연 입김이 흩어졌다. 공기 중에는 타는 종이의 매캐한 냄새와 향나무의 진한 잔향이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이 의식은 추모라는 탈을 쓰고 있었지만, 본질은 이 도시의 명줄을 쥔 자들이 벌이는 기괴한 계약 갱신에 불과했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반추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얼어붙은 강면 위로 낮게 깔렸다. 입술은 떨리지 않았으나, 심장 부근에서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긴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좌중은 숨을 죽였다. 도시수호파의 정예 요원들과 원류파의 전략가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면서도, 중재자로 선 도윤의 입술 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비석 옆에 놓인 낡은 기념석으로 시선이 향했다. 첫 수호자들의 맹세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는 누군가 정으로 내리친 듯 거칠게 뭉개져 있었다.
그때, 제단 바닥의 문양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이 철창을 들이받는 것 같은 물리적인 타격감으로 다가왔다. 찌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제단의 봉인 마력이 임계점을 넘어 폭주하려는 전조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높아지며 광장을 뒤덮었다.
"도윤 씨, 위험해요! 당장 물러나요!"
군중 틈바구니에서 이서하가 몸을 내밀며 외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한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도윤은 그녀를 향해 짧게 고개를 젓고는 주저 없이 제단 위로 손을 뻗었다. 마법은 대가 없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용자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낚아채 가는 갈고리와 같다. 그는 그의 안의 데이터를 마력으로 치환하며 비틀린 문양의 흐름을 강제로 찍어 눌렀다.
순간, 손바닥을 타고 불길이 치솟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끓는 기름을 부은 것 같은 열기가 신경을 타고 어깨를 지나 척추까지 번졌다. 신음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삼키며 제단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이 그어지더니, 차가운 돌 위로 핏방울이 점점이 박혔다. 붉은 얼룩이 하얀 눈 위에서 동백꽃처럼 피어났다. 비석의 문양이 도윤의 피를 머금고 서서히 보랏빛으로 가라앉으며 안정을 되찾았다.
폐가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가슴이 옥죄어 왔다.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가, 겨우 비석 모서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입안 가득 비릿한 쇠 맛이 감돌았다. 고통의 눈사태가 머릿속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지만, 도윤은 피 묻은 손을 감추지 않고 군중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다.
"보셨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힘의 민낯입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품 안에서 규약 초안을 꺼냈다. 종이가 겨울바람에 파르르 떨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합니다. 마법은 공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피, 누군가의 기억, 혹은 이 도시의 수명을 깎아 먹으며 유지되는 위태로운 저울질일 뿐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로운 규칙을 요구합니다."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마법 사용의 물리적 비용을 명문화하고, 어느 한 진영이 의식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공동 관리 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선언했다. 기록되지 않은 힘은 폭력일 뿐이라는 도윤의 말에, 앞줄에 앉아 있던 각 진영의 대표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도윤 씨, 그건 현실을 무시한 비약입니다."
최가을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녀는 단정한 제복 차림으로 팔짱을 낀 채 단상 위의 도윤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에요. 힘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매번 대가를 기록하고 위원회의 승인을 받으라는 건 손발을 묶고 전장에 나가라는 소리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요원들의 목숨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정리하자면, 최가을 씨는 통제받지 않는 칼자루를 계속 쥐고 싶다는 뜻이군요."
도윤의 도발에 그녀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옆에 앉아 있던 원류파의 박시온이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김도윤 씨의 이상은 높이 평가합니다만, 현실을 보시죠. 기록과 공동 관리라니요. 그것은 결국 서로를 감시하고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겁니다. 이 혼란스러운 서울에서 필요한 건 질서지, 관료주의적인 절차가 아닙니다. 선택하십시오. 안전입니까, 아니면 명분입니까?"
"그 안전이라는 게 대체 누구를 위한 겁니까!"
군중 속에서 한 남자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포효했다. 그는 지난번 블랙아웃 사태 때 가족을 잃은 유족 대표였다.
"당신들이 마법을 휘두를 때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 나갔어! 당신들의 그 잘난 규칙은 늘 사람이 죽고 난 뒤에야 생기지 않았나!"
유족의 외침은 얼어붙은 광장에 무거운 돌덩이를 던진 것과 같았다. 파문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도윤은 제단 옆에 반쯤 묻혀 있던 기념석의 흙을 손으로 거칠게 털어냈다. 손끝에 닿는 돌가루가 까칠하게 피부를 긁었다. 지워진 문장들 사이로 기분 나쁜 한기가 스며 나왔다.
"이 비석을 보십시오. 첫 수호자들의 이름이 왜 지워졌는지 아십니까? 그들도 대가 없는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희생은 결국 망각으로 이어지고, 망각은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제가 방금 제단과 접촉했을 때 느꼈습니다. 그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대가를 치르지 못한 마력에 잡아먹힌 겁니다."
도윤은 지워진 문장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만 유난히 온도가 낮아 손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어두운 구멍으로 모여들었다. 의심과 공포가 뒤섞인 눈빛들이 허공에서 얽혔다.
"누군가는 이 전쟁에서 이득을 보고 있겠죠. 대가를 숨기고, 힘만을 강조하는 자들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동료들이, 그리고 시민들이 이름 없는 제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지 않겠습니다. 이 규약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저는 이 제단의 봉인을 다시는 관리하지 않을 겁니다."
도윤의 선언은 벼랑 끝에서 던지는 승부수였다. 데이터 분석가로서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이 시스템의 취약점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양 진영의 대표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봤다. 제단의 마력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고, 나 없이는 누구도 이 고대 에너지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다.
의식은 일단 임시 휴회에 들어갔다. 팽팽했던 긴장이 한풀 꺾이자, 참았던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와 전신을 덮쳤다. 도윤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의식장 뒤편에 마련된 천막으로 향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천막 입구에서 무너질 뻔한 순간, 누군가 도윤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거봐요, 내가 뭐랬어. 혼자 다 짊어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서하였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도윤을 천막 안 간이 의자에 앉혔다. 천막 안은 사람들의 체온과 석유난로 덕분에 미묘한 습기가 감돌며 훈훈했다. 밖의 살인적인 추위와는 대조적인, 작은 피난처 같은 공간이었다.
"서하 씨..."
"말하지 마요. 입술 다 터졌네."
그녀는 도윤의 젖은 장갑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손바닥의 붉은 화상 자국을 본 그녀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따뜻한 보온병과 종이컵을 꺼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이 컵에 담기자, 짭조름하고 구수한 냄새가 천막 안에 퍼졌다.
"이거라도 좀 마셔요. 먹어야 규칙을 바꾸든 세상을 구하든 할 거 아냐."
그녀가 그의 손에 컵을 쥐여주었다. 차가웠던 손가락 끝에 온기가 스며들자 몸이 절로 잘게 떨렸다. 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컵을 입가에 가져갔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얼어붙었던 장기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존의 감각 그 자체였다.
"맛있네요. 살 것 같아요."
"당연하죠.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구한 건데."
이서하는 옆에 앉아 작은 밥공기를 내밀었다. 둘은 말없이 밥을 나누어 먹었다.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사소한 금속성 소리가 오히려 마음을 안심시켰다. 밖에서는 여전히 진영 대표들의 고함과 군중의 웅성거림이 들려왔지만, 이 얇은 천막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잠시나마 전쟁터에서 비껴나 있었다.
"도윤 씨."
그녀가 도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약간의 굳은살이 느껴지는 정직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아까 한 말, 진짜예요? 봉인 관리 안 하겠다는 거."
"반은 진심이고, 반은 협박이었어요. 사실 저도 무서워요. 내가 세운 이 규칙이 정말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족쇄가 될지 확신이 안 서거든요."
그는 국물에 뜬 기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도윤의 취약함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서하는 그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완벽한 답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오늘, 도윤 씨 덕분에 눈앞에서 죽을 뻔한 사람들은 살았잖아요. 그거면 된 거 아닐까? 틀려도 괜찮아요. 같이 책임질 사람 하나쯤은 옆에 있잖아요."
그녀의 말은 화려한 수식어는 없었지만,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박힌 얼음을 녹여내기에 충분했다. 도윤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 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맑게 담겨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숨을 골랐다.
휴식 시간이 끝나감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도윤은 남은 국물을 단숨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가야겠네요."
"어느 쪽도 완전히 만족하진 못할 거예요."
이서하가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도윤은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알아요. 그래도, 이번엔... 잃을 것만은 줄여 보겠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요."
도윤은 그녀에게 끝내 말로 다 하지 못한 약속을 눈빛으로 건네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다시 피부를 때렸지만, 입안에 남은 따뜻한 국물의 여운이 도윤을 지탱해주었다.
의식장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고조되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급히 달려오더니 도윤의 앞을 막아섰다.
"김도윤 씨! 제단의 봉인이 다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강력해요!"
피로가 가시지 않은 손바닥이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도윤은 붉게 물든 제단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저 너머에서 기다리는 것이 또 다른 희생일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무엇을 대가로 내줘야 할지 고민하며, 도윤은 다시 얼어붙은 무대 위로 발을 내디뎠다.